알라딘서재

꼼쥐님의 서재
  • 츠바키 문구점
  • 오가와 이토
  • 15,300원 (10%850)
  • 2017-09-15
  • : 7,219

책에도 다 인연과 때가 있어서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떠들어도 내 손에 들어와 읽히는 데는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고, 어떤 책은 그마저도 인연이 닿지 않아 기억 속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기도 한다.  일본 작가 오가와 이토의 소설 <츠바키 문구점>도 그런 종류의 책 중 한 권이다. 나는 사실 이런저런 통로를 통하여 일독을 권유하는 말을 수차례 전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책을 읽어 본 사람들이 쏟아내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수도 없이 들어왔었다. 그럼에도 책을 읽을 기회는 좀체 찾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책의 제목만 익숙해질 뿐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나의 게으른 천성에 더해 남들이 좋다고 하면 일부러 뻗대고 보는 반골 기질이 크게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2025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저런 이유로 책도 손에 잡히지 않고, 블로그에 짧은 글 한 편을 올리는 일조차 힘에 겨워할 테지만 나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책을 읽는 것도 어렵고 어쩌다 읽은 책도 그에 대한 감상을 기록하는 게 어찌나 힘이 들던지... 사실 <츠바키 문구점>을 다 읽은 후 처음 들었던 생각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모여 저마다의 삶을 이루고 그와 같은 이들의 특별하지 않은 삶을 후대의 누군가는 또 그리워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마치 대한민국의 평범한 이를 대표하는 영희와 철수의 생각처럼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만 떠오를 뿐 별다른 게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 하면 <츠바키 문구점>을 읽은 독자 대부분이 그렇게 느긋하고 편안한 일상이 주는 기쁨을 첫 번째 감상으로 꼽았다면 작가의 의도가 100% 달성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드는 것이다.


"그날 오후, 초인종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지면에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는 최고의 자장가이다. 최근 며칠 내내 점심때가 지나면 꼭 비가 온다. 나는 9시 반에 츠바키 문구점을 연 뒤, 손님이 드는 상태를 보면서 안쪽 부엌에서 점심을 먹는 것이 일과다. 아침은 따뜻한 차나 약간의 과일 정도로 때워서 점심때는 비교적 든든하게 먹는다. 오늘은 손님이 별로 없어서 안쪽 소파에 누워 있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잠시 눈만 붙일 생각이었는데 그대로 깊이 잠든 것 같다. 반년이 지나 이곳 생활에도 익숙해지고, 긴장감이 풀린 탓인지 요즘 들어 이상하게 잠이 쏟아진다."  (p.15)


소설의 주인공은 '포포'. 아직 미혼의 젊은 여성이다. 어린 시절, 편지를 대필해주는 선대(할머니)로부터 서도를 익히던 포포는 엄하고 무섭던 선대의 교육에 반발하여 집을 나가기도 했지만, 선대가 세상을 뜬 후 오래된 동백나무 옆의 낯익은 문구점으로 돌아와 편지를 대필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선대가 그랬던 것처럼. 포포는 편지를 써달라고 찾아오는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영혼이 담긴 편지를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사연에 맞게 편지지를 고르고, 필기도구를 선택하고, 봉투를 정하고, 우표를 붙이는 것 하나까지 꼼꼼하게 따진다. 한 통의 편지를 쓰기 위해 잠시나마 의뢰인이 되어 그의 삶을 되짚어 보는 것이다.


"공 굴리기 인생이란 쇼타로 씨 아버지가 예전에 잘 사용했던 말이다. 지구를 공에 견주어 자신은 그 위를 자유롭게 걷는 인생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다. 온 세계를 날아다니는 바쁜 자신의 인생을 유머로 감싸서 작은 웃음으로 바꾸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주문을 적는 종이였던 멋없는 이면지는 수제 대지에 붙였다. 글씨 주위는 압화로 장식하고, 겉에도 전부 압화로 채웠다. 그 위에 얇은 종이를 포개서 양초로 코팅했다."  (p.203)


가마쿠라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대필로 생계를 이어가는 젊은 여인 포포의 단순한 일상과 겹쳐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시종일관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제공한다. 이웃집에 혼자 사는 바바라 여사를 비롯하여 의뢰인이었던 남작이나 빵티 등 가까운 사람들과 야유회를 하기도 하고,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면서 지금은 없는 선대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이탈리아에 있는 한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터놓았던 선대의 인간적인 고민과 손녀 포포에 대한 사랑과 걱정을 그 빛바랜 편지를 통해 알게 된다.


"언젠가 먼 미래에서 오늘이라는 날을 돌이켜보면, 분명 엄청나게 특별한 하루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지금은 아직 '그 안'에 있어서 그걸 잘 모르지만."  (p.270)


손 편지를 쓰거나 받는 일이 희귀해졌다. 우편함에는 각종 고지서와 홍보 전단지들로 가득 찼다. 고지서나 청구서 등도 전자메일로 받기 때문에 우편함은 갈수록 본연의 기능을 잃고 적적해졌다. 생일 축하도 카톡 문자나 인터넷 선물로 대체된 지 오래다. 우리는 갈수록 서로의 체온을 잃고 가슴은 허전해져만 간다. 게다가 계엄과 탄핵 정국이 지속되면서 독서도, 글쓰기도 귀찮은 일이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태를 언제까지고 지속할 수는 없다는 생각은 단지 생각으로만 그칠 뿐 의지가 되어 나를 일으켜 세우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평범한 일상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츠바키 문구점>을 읽고 있노라면 오히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불끈 솟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썼던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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