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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쥐님의 서재
  • 웰컴 투 탄광촌 이발소
  • 오쿠다 히데오
  • 15,120원 (10%840)
  • 2025-02-07
  • : 1,190

앞부분 몇 쪽을 넘기기도 전에 들었던 생각은 '어라, 이 책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은데' 하는 기시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책의 표지나 제목은 전혀 눈에 익지 않다는 사실. 일본어에 문외한인 내가 한국어로 번역도 되기 전에 원서로 읽었을 리도 만무하고. 그렇게 나는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일본 북쪽 홋카이도 산간지방인 도마자와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것도, 주인공인 무코다 야스히코가 등장하는 것도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을 보면 나의 무딘 기억력을 감안하더라도 어디선가 분명 읽었던 게 틀림없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작가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2017년 1월에 <무코다 이발소>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소설. 나는 그해 2월에 책을 읽고 리뷰를 쓴 바 있었다.(https://blog.aladin.co.kr/760404134/9113944)


"'무코다 이발소'는 홋카이도 중앙부에 있는 도마자와 면에서 전쟁이 끝난 지 오래지 않은 1950년부터 내려오는 옛날 이발소다. 주인인 야스히코는 쉰세 살의 평범한 이발사, 스물여덟 살에 아버지로부터 이발소를 물려받은 후로 사반세기에 걸쳐 부부 둘이 이발소를 꾸려오고 있다."  (p.5)


나의 무딘 기억력 덕분에 나는 지루한 줄 모른 채 소설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책에 등장하는 안물이나 지명은 낯이 익었지만 줄거리는 도통 기억나지 않았던 까닭에 나는 마치 오쿠다 히데오의 갓 나온 신간소설을 이제 막 받아 든 것처럼 설렜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두 번 읽게 되었다. 전혀 뜻하지 않았던 일인데 말이다. 나의 기억력은 형편없는 것이어서 이처럼 읽었던 책을 다시 읽게 되거나 전에 구매했던 책을 다시 구매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제는 그마저도 무뎌져서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 마는 쿨한 경지에 이르렀다고나 할까, 아무튼.


과거 탄광 덕에 번성했던 도마자와는 한때 인구 8만을 거느린 일본 유수의 탄광도시였으나 1960년대 후반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 석유로 전환되고 값이 싼 석탄이 해외에서 유입되는 바람에 경쟁력을 잃고 쇠퇴 일로에 접어들게 된 불운의 마을이다. 인구 유출이 계속되면서 열 군데 이상 잇던 마을의 이발소도 이제는 단 두 군데만 남게 되었다. 장래성이 없다고 판단한 야스히코 역시 자신을 끝으로 문을 닫을 생각이었다. 맏딸인 미나는 도쿄에서 의류 회사에 다니고 중학생 시절부터 절대 이발소를 잇지 않겠다고 하던 아들 가즈마사 역시 삿포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 설에 귀성했던 아들이 고향에 돌아와 이발소를 물려받겠다는 폭탄선언을 하면서 야스히코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소설은 인구 감소로 인한 지역 소멸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드러내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지역에 남은 고령의 원주민들에 대한 의료 문제, 지역에 남은 젊은 사람들의 혼인 문제, 영화 촬영으로 시끌벅적해진 마을, 도마자와 출신 젊은이의 사기 행각 등 시골 마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사건 사고가 등장한다. 그럼에도 마을 청년과 공무원의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 뇌일혈로 쓰러진 기하치 씨, 중국인 신부를 맞이한 노총각 다이스케, 고향으로 돌아와 조그만 술집을 연 사나에, 도마자와를 배경으로 촬영된 영화의 수상 소식, 도마자와 출신 젊은이의 범죄 등 에피소드 형식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오쿠다 히데오의 담백하면서도 간결한 문체가 더해져 비교적 술술 읽히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가슴 한켠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우리가 직면한 지역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우리나라 시골의 암담한 미래이기 때문이다.


"야스히코는 시간에 맡기기로 했다. 지금까지도 동네 사람들끼리 으르렁거린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시간이 해결해주었다. 피차 머리가 식어 이성을 되찾으면 태도를 굽힌다. 포기하는 면도 없지 않다.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으니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수밖에 없다. 맞은 무라타도 진짜로 상해 신고를 할 리는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용서할 것이다."  (p.210)


올해 홋카이도에서는 재난에 가까운 폭설 소식이 연이어 전해지고 있다. 제설작업을 하던 노인이 눈에 파묻혀 사망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것이 비단 이웃 나라만의 일일까.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 이변은 나날이 증가하고 이에 대처할 노동력을 지닌 젊은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도시로 빠져나가는 현실. 어쩌면 오쿠다 히데오의 <웰컴 투 탄광촌 이발소>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만 달리 하면 그것은 곧 우리나라 현실을 다룬 우리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은 일본보다 더 심각한 지경에 처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필요한 것은 시대를 이끄는 거대한 기치와 인생을 뒤흔드는 불같은 정열, 혹은 타인을 앞서는 빛나는 성공이 아닐 수도 있다. 무코다 이발소에서 오늘도 드나드는 동네 사람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일에 충실을 기하는 야스히코처럼, 정든 동네와 땅에 대한 사랑과 사람들끼리 따스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여유와 오늘 하루를 뿌듯하게 사는 작은 성취감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p.317~p.318 '옮긴이의 말' 중에서)


나의 무딘 기억력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두 번 읽었던 오쿠다 히데오의 <웰컴 투 탄광촌 이발소>. 나는 언젠가 육체의 늙어감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눈이 침침하고 시력이 나빠지는 것은 타인의 약점을 세세히 보지 않게 하는 것이며, 청력이 약해져 작은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것은 속닥거리는 험담을 듣지 않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차츰 희미해져 가는 기억력으로 인해 나는 예전에 읽었던 책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다시 읽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꼭 나쁘기만 할까. 그런 까닭에 육체의 노화는 자신의 삶에서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이루겠다고 욕심을 부리느냐고 꾸짖고 질책하는 하나의 바로미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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