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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쥐님의 서재
  • 셔닐 손수건과 속살 노란 멜론
  • 에쿠니 가오리
  • 16,830원 (10%930)
  • 2024-12-09
  • : 5,015

다른 작가가 쓴 소설인 줄 알았다. 혹시 번역가가 바뀌었나 해서 신경도 쓰지 않았던 번역가의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달라진 건 없었다. 작가의 이름은 에쿠니 가오리, 번역가는 김난주.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번역을 맡았던 사람은 주로 김난주 또는 신유희 번역가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달라졌다고 느낀 나의 감상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내가 알던 에쿠니 가오리는 간결한 문체와 절제된 감성, 그리고 인간의 욕망에 대한 거침없으면서도 적나라한 묘사, 각이 잡힌 구성 등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작가의 최신작 <셔닐 손수건과 속살 노란 멜론>은 문체에서부터 구성에 이르기까지 내가 알던 에쿠니 가오리가 아니었다. 문체는 부드럽고 조곤조곤 길어졌으며, 독자들을 감싸는 듯한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세이케 리에는 다미코의 대학 시절 친구다. 외국 금융회사에서 일하느라 영국에서 오래 생활했다. 한 달 전, 일을 그만두고 귀국할 텐데 살 곳이 정해질 때까지 당분간 너희 집에서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와서, 다미코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 집에는 남편과 아이가 있지만,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다미코는 그 어느 쪽도 없다."  (p.8)


소설은 친하게 지냈던 대학 동창 중 한 명인 리에가 오랜 해외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세 사람의 대학 동창인 다미코와 리에, 그리고 사키는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도 크게 다르다. 한때 결혼을 했었으나 이혼을 하고 다시 혼자가 된 리에, 평범한 가정을 꿈꾸었으나 50대 후반이 된 지금도 작가로서 어머니 가오루와 함께 살고 있는 다미코, 아들 둘을 낳은 주부로서 무심한 남편과의 기계적인 일상을 반복하면서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를 문병하기 위해 요양원을 드나드는 사키는 이른 나이에 결혼하겠다는 큰아들과의 갈등 상황에 고민하고 있다.


"아마도 가온이 제안했을 것이다. 얼마 전에 만나고서 알았는데, 가이는 벌써 가온에게 꽉 잡혀 있었다. 아들이 완전히 독립하는 셈이니까 어머니가 무척 허전할 거다, 그러니 그 빈자리를 메울 것이 필요하다는 둥 하고. 어이가 없다. 이 집에는 손이 많이 가는 남자가 둘이나 있고, 보살펴야 하고 보살핀 만큼 풍요롭게 답해 주는 마당도 있다. 그런데다 시설에 있기는 하지만, 늙은 시어머니도 보살펴야 한다. 그런데 뭐가 부족하다는 것인지. 요는 둘이서 사키의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속셈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화가 났다. 분개하는 생각을 넘어 피가 거꾸로 치솟을 것 같은데, 그건 사키의 방식이 아니다."  (p.217~p.218)


대학 시절 '쓰리 걸스'로 불리며 친하게 지냈던 리에와 다미코, 그리고 사키는 리에의 귀국과 함께 완전체가 되었지만, 그들 앞에 놓인 현실과 각각 떨어져서 살았던 독립된 삶의 관성이 시간을 거슬러 과거 그들의 대학 시절로 향하는 추억 여행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소설은 그렇게 과거 절친했던 세 사람의 삶을 조망하면서 얽히고설킨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풀어나간다. 우리의 삶은 이렇듯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성격의 사람들이 우연이라는 선물을 통해 관계를 맺고, 약속이나 한 듯 흩어지기도 하면서 어울렁더울렁 살아가게 마련이다. 작가는 그런 모습들을 가감 없이 포착하여 우리들 앞에 자연스레 펼쳐 보인다.


"리에가 이사한 지 일주일이 되었다. 다미코는 솔직히 침실을 되찾아 좋았고, 그보다 복도에 쌓인 대량의 짐이 없어지면 개운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정작 리에가 없어지고 나니, 예상보다 훨씬 허전했다. 실제로 그 비 내리는 오후, 짐은 많았지만 이사는 순식간에 끝났다. 업자 두 명의 힘이 얼마나 세던지, 작업은 또 얼마나 효율적이고 신속하던지 가오루와 다미코는 그저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트럭을 선도하듯 차를 몰고 후다닥 사라진 리에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다미코는 상실감을 느낀다."  (p.348~p.349)


남자들은 나이가 들수록 도시를 떠나 자연에 파묻히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만의 동굴에 들어가고 싶은 까닭이다. 말하자면 텔레비전 속 자연인의 삶이 낭만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 익숙하지 않은 도시내기들에게 자연에서의 생활은 단 한 달도 버티기 힘든 게 사실이다. 시끌벅적한 도시의 삶은 복잡한 관계로 인해 때론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그 관계를 모두 지우고 나면 차오르는 상실감과 고독을 우리는 감당하기 힘들다. 어쩌면 작가는 어쩔 수 없이 맺게 되는 복잡다단한 관계에 대해 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그렇게 의미도 없이 흘러가는 것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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