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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쥐님의 서재

친구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흔한 농담 중 하나는 "양심이 밥 먹여주냐?"라는 말이다. 예컨대 친구 몇몇이 어울려 밥을 먹거나 술을 먹고 계산을 해야 할 때, 미리 자신이 사겠다고 큰소리쳤던 친구 왈, "이런, 어쩌지. 지갑을 놓고 왔네."라고 할라치면 다른 친구가 슬쩍 나서서 대신 계산을 마친 후 "야, 너는 양심 좀 있어라."농을 섞은 타박을 하게 된다. 지갑을 놓고 왔다는 친구는 이에 지지 않고 "양심이 밥 먹여주냐?"며 싱긋 웃는 것으로 멋쩍은 상황은 종료되고 만다. 양심.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라는 사전적 의미를 떠나서 내가 생각하는 양심은 적어도 인간 누구에게나 삶의 밑천으로 깔고 있는, 아무리 나쁜 인간도 회개만 하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는, 하느님이 부여한 선물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 정권의 길지 않았던 지난 시간을 되돌려보며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개인의 양심이란 인류 보편의 산물이 아니며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의 스펙트럼을 갖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천성적으로 나쁜 양심의 소유자가 아무리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고 해도 결코 선한 양심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양심이란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다. 종교에 감화되어 조변석개하거나 없던 선함이 더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종교는 하나의 동호회가 갖는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가 알고 있던 양심은 사회 구성원의 보편적 상식에 기초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결속과 자부심을 증가하며, 결과적으로 구성원 개개인이 삶의 가치를 음미하면서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순기능적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우리의 양심에 기초한 도덕은 한낱 희망사항일 뿐 양심이 악한 인간들에게 있어 도덕이란 지킬 필요조차 없는,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 것도 아닌, 어찌 보면 결코 지켜서는 안 되는 허망한 구호이자 장식용의 표어일 뿐이었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말이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지켜야 한다는 게 법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문에 있는 법 조항만 지키면 우리가 할 도리는 다한 것이라는 의미였음을 현 정권의 수뇌부를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명백한 주가조작과 명품백 수수가 사실로 입증되었음에도 어떠한 사과의 말도,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과 법인카드를 사적 용도로 마구 사용하였음에도 그게 뭐가 문제냐는 식의 적반하장식 뻔뻔함을 드러내는 사람, 한 해 상속세 최고세율 적용 대상자가 2980명 선에 그치는 고액 자산가를 돌보기 위해 상속세 인하가 마치 국민 전체를 위한 정책인 양 포장하는 사람, 아빠가 빌려준 돈으로 주식을 사서 아빠가 다시 비싼 값으로 그 주식을 구매하는 수법을 통하여 편법 상속을 하였다는 비난이 있음에도 돌반지 대신 주식을 사줬을 뿐이라고 우기는 사람 등 현 정권의 수뇌부는 우리가 믿어왔던 양심을 전면적으로 재인식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현실은 이러한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현 정권이 집권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MB정권이나 박근혜 정권 시절만 하더라도 정권의 수뇌부에 오르려는 자들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면 그것에 대해 순순히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부끄러워하는 척이라도 했었다. 그러나 현 정권에서는 그마저도 사라졌다.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혹은 법적으로 기소가 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느냐는 식의 뻔뻔함을 그들 전체의 무기인 양 한결같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놀라게 된다. '세상에, 저런 인간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종일 맴돈다. 5.18 민주화운동 폄훼 글에 좋아요를 누른 당사자에게 비난이 이어지자 앞으로는 손가락 운동에 신경을 쓰겠다고 말한 후안무치의 인간에게 인간의 보편적 양심이 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장마가 그친 대기는 그저 무덥다. 무더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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