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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처먹기
  • 고양이 왕
  • 채희철
  • 14,400원 (10%↓800)
  • 2023-07-31
  • : 124

채희철의 『고양이 왕』은 기록해 둘 만한 책이다.
특히 후반부 그가 다루는 유머에 대해서. 이 장과 타자를 다루는 장에 걸쳐 그는 소쉬르 이후 융성한 동일성에 입각한 언어 중심주의의 폭력성과, 그에 반하는 차이의 철학의 안티로고스중심 사유의 한계를 포착함과 동시에, 유머가 제공하는 새로운 사유의 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유머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말해 유머는 서로 다른 두 습관 체계가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습관의 와해와 습관에 갇힌 우리 자신의 해방의 순간이다. 습관이 와해될 때 우리는 신체가 균형을 잃는 그 아찔함과 더불어 우리를 구속하고 있던 기존의 통념과 통속에서 자유롭게 되는 감각을 느낀다. 그것이 유머 감각이다. 이 유머 감각을 세계가 지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습관 체계를 갖고 있고, 세계는 이 생명들이 갖고 있는 습관 체계들 간의 만남, 조우, 관계 맺기, 충돌이다. 이것이 세계가 지닌 창발성이고, 생성이고, 세계 자체의 본질이다. (135p)

그의 유머론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소쉬르 이후의 사회 이론을 지배해 온 언어중심주의이다. 채희철은 에두아르도 콘을 경유하며 이런 이론들이 “언어와 표상을 혼동하는 것(137p)"이라고 비판한다. 언어중심주의 아래에서 기호 작용의 목적은 소통이 되고, 타자는 언어를 갖지 못한 자, 즉 구제되어야 할 존재로 전락한다. 흑인은 언어를 갖지 못했으므로, 여성은 언어에 서툴기 때문에, 동물은 언어가 없으므로 — 언어중심주의는 이렇게 제국주의적 자기 확대의 논리를 정당화한다.

차이에 대한 이러한 본질주의적 관점은 타자에 대하여 주체가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낸다.(142p) 그리하여 주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런 본질적인 차이를 인정한 후, 전적으로 이해 불능성인 타자를 완전히 수용하거나 반대로 완전히 배제하거나 그도 아니면 경쟁(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하거나 또는 모나드적으로 각 개체의 고립 속에서 살아가는 타협을 선택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처럼 설명한다.(143p)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타자성과 차이를 강조하는 사유의 한계에도 정면으로 맞선다. 대두되고 있는 신체 철학, 그 일자-신체(우리는 모두 같은 몸을 갖고 있다)를 비판하는 차이의 철학은 유기체적으로 설정된 한계(차이)를 갖는 다수의 다자-신체에 주목(143p)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전자의 입장이 갖는 자기 동일성의 원리를 내포할 수 밖에 없다. 여성이 여성으로서 존립하기 위해서는 구조적으로 여성에 대한 자기 동일성 추구라는 내적 논리, 그 자기 동일성이 일자-신체와 다르고 결코 열등하지 않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통합된 신체로서의 존재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차이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 차이의 주체가 새로 확립되어야 하고, 끝내 자기 동일적 주체가 소환될 수 밖에 없으며, 그 차이를 담을 수 있는 거대한 그릇이 필요하다. 창이 없는 고립된 모나드의 생성은 차이의 철학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물학적 차이의 철학에 의해서는 생명의 진화 혹은 세계의 창발성을 설명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듯이 세계의 창발성은 새로운 만남, 즉 새로운 블록이 생성되는 과정에 있다. 그러나 자기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 각자의 모나드에 갇혀있는 현존재는, 결코 들뢰즈가 마치 결혼과도 같다고 표현하는 만남, 즉 과정으로서의 되기, 그 블록의 생성에 가담할 수 없다. (이는 현재 한국의 정치 상황과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 안티 오이디푸스를 표방하지만, 결국 오이디푸스의 체계를 재생산하고 있는 좌파 지식인층과, 그들의 몰락만을 노리고 있는 우파 권력층. 아버지 살해 이데올로기가 잠식한 세계 등등)

그는 혁명의 필요성을 외친다. 그가 말하는 혁명이란, 일종의 기호론인데, 타자란 단순하게 말해 서로 다른 습관들의 체계를 지칭하는 것이며, 차이는 그 습관들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세계에 편재해 있는 생명, 그것들이 지닌 다양한 습관들의 체계이다. 습관들은 결국 인간의 언어활동과 결코 동의어가 아니며, 같은 의미체계로 편입될 수 없다.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습관에 대해 웃을 수 있고, 그것을 낡고 고루한 것으로 취급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습관의 창출’(145p)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습관 체계를 붕괴시킬 만한 행위의 반복이 필요하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행위를 충분히 반복한다면,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던 아저씨가 사냥감이라고 인식되는 것을 넘어설 만큼 반복한다면, 그들의 습관 체계는 붕괴될 것이고, 밥을 주던 행위는 세계의 '증여’ 혹은 자연의 '선물’(145p)로 인식될 것이다. 또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밥을 주는 행위가 자선이나 기부 등의 인간 사회적인 맥락에서 벗어나 보다 더 큰 세계의 맥락에서 나를 내어주는, 가령 인간도 사냥의 대상, 사냥감이 될 수 있는 신체에 불과하다는 습관 체계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읽으면 읽을수록 고양이가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커진다. 나는 털이 많은 고양이를 키우고 싶고, 또 이름은 무엇으로 지어줄지에 대해
지난주 아파트 앞에서 어느 길고양이에게 츄르를 줬던 기억. 제 발로 호랑이 굴에 걸어 들어간 사냥감에 다름없는 나의 행동에, 오직 유용함에 기반한 웃음을 머금은, 가령, 고양이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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