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륵사락 / 대나무에 소리 나네 / 밤의 눈> 얼마나 조용한 밤이면 대나무에 눈 쌓이는 소리가 들릴까. 정말이지 고요하고 평온한 밤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는 댓잎에 눈 쌓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늦은 시간까지 홀로 깨어있는 이의 고독함이 느껴진다. 날이 추워지는 이맘때면 생각나는 시(하이쿠)다. 시 속 상황을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이 시를 읊조리면 눈 내리는 어느 고요한 밤이 떠오르곤 한다. 이처럼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그 상황으로 독자를 끌고 들어가는 점이 바로 하이쿠가 지닌 매력이 아닐까.
하이쿠란 일본 고전 시가의 한 갈래이자 5‧7‧5의 열일곱 글자로 이루어진 정형시다. 또한 계절을 나타내는 ‘계어’를 통해 자연의 모습을 그리는 서정시이기도 하다. 외국 고전 문학이라는 점에서 하이쿠는 한국 독자에게 상당히 낯선 작품이다. 그렇다면 ‘일본 고전 시가’라는 수식어는 잠시 내려놓고 하이쿠의 ‘서정성’에 집중해보면 어떨까 싶다.
하이쿠가 지금의 서정성을 갖추게 된 데에는 이 책의 지은이 마쓰오 바쇼의 역할이 크다. ‘해학적인 구’라는 의미에 걸맞게 초기 하이쿠는 일상어 중심의 격이 낮고 우스꽝스러운 표현이 많았다.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하이쿠에 당시 하이쿠 시인이던 바쇼는 염증을 느꼈고, 결국 서른일곱 살에 작은 암자에서 은거를 시작한다. 이후 선인들의 발자취를 직접 체험하고자 마흔한 살에 방랑길에 나선 바쇼는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하이쿠를 지으며 바쇼풍 하이쿠를 만들어간다. 주로 이 시기의 작품을 모은 책이 바로 《바쇼의 하이쿠》다.
바쇼의 하이쿠는 대체로 소박하며 눈에 그리듯 생생하다. 때로는 이런 순간마저 시의 소재로 채택하는 그의 안목에 감탄이 나올 정도다. 본문 <파초에 태풍 불고 / 물대야에 빗소리 / 듣는 밤이여>가 그렇다.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치고 빗방울이 물대야에 떨어져 스산하게 느껴지는 밤을 그대로 하이쿠에 담았다. 그저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는 것이 아닌, 삶과 자연의 다양한 순간을 포착하여 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실감 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자연의 하찮은 현상이 깊고 예리한 감각에 의해, 우주의 심오한 사건인 양 몇 마디로 응축됨으로서, 그로 인한 울림의 파장이 크낙한 여백으로 퍼진다. 그래서 바쇼의 하이쿠는, 마치 하늘이 어느 순간 살짝 열렸다가 닫히는 것을 본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추천의 글)
하이쿠를 감상할 때는 여백을 채운다는 마음으로 읽는 편이 좋다. 열일곱 글자라는 제한 탓에 하이쿠 한 편에 많은 것을 풀어쓸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이쿠를 읽고 떠오르는 장면을 조금씩 선명하게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문학 감상에는 정답이 없으니 마음 가는 대로 상상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나아가 하이쿠 감상에 재미를 붙였다면 작가의 삶을 함께 살펴봐도 좋으리라. 바쇼의 경우 본인의 삶과 작품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작가의 삶을 알면 작품 감상이 더 수월해질지도 모른다.
이 책은 계어를 기준 삼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작품을 분류했다. 계절감이 두드러지는 작품의 특징을 살려 하이쿠가 낯선 사람에게도 ‘서정시’로서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시작하기 어렵다면 본인이 좋아하는 계절부터 읽어보자. 그리고 찬찬히 읊조리면서 바쇼가 본 그 상황을 떠올려보자. 분명 그 풍경이 눈앞에 선연히 그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