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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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 슬픈 인간
  • 나쓰메 소세키 외
  • 14,400원 (10%800)
  • 2017-12-04
  • : 2,934
산문집을 구매할 때, 혹은 선물 받을 때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책을 고르는 기준이 된다. 세상의 모든 작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책을 사야만 하는 이유를 특정 작가의 이름에서 찾는 것이다. <슬픈 인간>도 그런 이유로 책장에 꽂혔다. 산문집은 꽝 없는 보물찾기 같아서, 읽고 싶은 작가의 작품을 찾아가는 도중에 다른 보물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번에 발견한 보물은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나의 고독은 습관입니다>였다.

“예전부터 나는 사람 만나고 사귀는 걸 싫어했다.”(p264)

첫 문장부터 마주한 솔직하고도 담백한 진심에 순간 누가 내 이야기를 쓴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었다. 나도 사람과의 교제에 서투른 편이라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기 때문이다. 작가는 신경질적이고 제멋대로인 성격과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을 이유로 꼽으며 자신의 고독이 습관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설명한다. 또한 선천적인 기질로 인해 자신을 ‘동굴 속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서술하며 쇼펜하우어의 말을 인용해 고독자를 위한 위로를 받았다고 덧붙인다. 여기까지만 읽었는데도 작가가 제목에 ‘습관’을 넣은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습관은 특정 행위의 반복이 굳어진 것인데, 작가는 선천적인 기질을 이유로 스스로를 고립시켜 고독을 반복했다. 그 행위에 자의가 얼마나 포함되었는지는 몰라도 어쩔 수 없이 반복된 고독은 몸에 배게 되었고, 결국 고독은 작가에게 취향이 아니라 습관이 된 게 아니었을까. 만약 고독이 그에게 습관이 아니었다면, 제목에 다른 단어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내가 좋아서 동굴에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독을 강요당하고 있다.”(p268)

그렇다면 나의 고독은 어느 쪽일까. 취향일까 습관일까. 예전에는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혼자 있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거처를 옮기고 코로나로 인해 사람과의 접촉이 줄어들면서부터, 여전히 나는 고독을 즐기는 사람인지 의문이 든다. 홀로 있는 생활이 싫은 건 아니다. 지금의 생활이 주는 장점이 있고, 나는 그 안에서 여유로움과 안정을 느낀다. 다만 가끔씩 ‘정말 이대로도 괜찮나?’라는 생각이 들 때면 작가의 말처럼 진정한 고독 생활이란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글을 읽고 나서 내가 가진 고독의 시발점을 생각해 보았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혼자 있기를 원하게 된 걸까. 사람들과 부대끼는 걸 무작정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있는 걸 누가 싫어할까. 하지만 모르는 다수와 거리낌 없이 부딪치기에 내 성격은 너무 예민했고, 겁이 많았다. 예민함을 끌어안은 채로 사람을 상대하려면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아쉽게도 나는 인간관계에서 발생한 여러 자극을 버텨내지 못했고, 결국 그걸 감내하면서 사람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려버렸다.

“필경 인간이 고독한 것은 주위에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리라.”(p271)

이 말대로라면 고독한 사람은 가여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말은 고독한 사람에게 너무 듣기 좋은 말이 아닌가? 나는 이 말이 고독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처럼 들린다. 마치 네가 고독한 건 네 탓이 아니라는 것처럼. 작가는 널 이해하는 사람 한 명만 있으면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의미에서 했을지 몰라도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고독한 사람도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해도 결국 자신을 가둔 건 자신이기 때문이다.

고독을 깨는데 타인이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시작은 나여야 한다. 이건 나한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자유가 좋다는 핑계를 대며 혼자 있을 수만은 없을 테니까. 자신의 고독이 습관임을 알게 된 나에게도 이를 깨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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