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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힘든 개념이 있다면 바로 민족(nation)과 민족주의(nationalism)일 것이다. 세계화 혹은 전지구화가 보편적 흐름이 되어가면서 이 두 개념의 학문적 가치는 용도폐기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 두 개념은 아직도 유효하다. 아니 적어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끝까지 유효할 지도 모르겠다. 그간 이 두 개념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는 <근대적 산물로서의 민족/민족주의>로 함축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수많은 반론들이 지금 제기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탈근대 사회에서의 민족-민족주의를 다시 사유할 수 있는 지평을 다시 열어젖히는 것이다(난 개인적으로 민족-민족주의는 모두 배치- 여기서의 배치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젠더, 계급, 자본, 국가, 인종 등 - 의 산물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민족과 민족주의를 단일한 형태나 고정된 형태로 보는 것을 부정한다. 그것은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 이러한 요소들 간의 관계맺음을 통해서 그 의미를 부여받고, 그것은 언제나 다른 배치를 구성할 수 있는 잠재성에의 길을 터 놓는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 아래의 글은 경희대학교 대학원 신문의 내용을 담비에서 실은 것을(http://www.dambee.net/news/read.php?idxno=10842&rsec=MAIN&section=MAIN) 옮겨온 것이다.

겔너는 그의 고전적 저서 『민족과 민족주의』에서 나폴레옹 시대에 쓰여진 샤미쏘의 소설을 언급하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겔너는 그 내용에 대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그림자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민족을 가져야 한다는, 또는 특정 민족에 속해야 한다는 의미로 분석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달리 말해서 민족성은 그림자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인간의 속성이라는 인식을 내세운다는 뜻이다. 민족주의자들은 이런 민족의 ‘자연성’과 ‘보편성’을 다시 영구 불멸의 탈역사적 주체로 발전시키는데 활용하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이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매일 접하게 된다. 2008년 한국의 봄을 달군 화제는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에서 벌어진 중국 민족주의의 폭력적 양상과 이에 대한 한국 대중의 민족주의적 반응이었다. 또 일본에서 독도에 대한 민족주의적 교육 강화에 대한 한국의 민족주의적 대응이었다. 쇠고기 파동의 확산 과정에서도 식품 안전 못지않게 민족적 자존심이 작동했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인다. 민족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은 물론 인터넷과 같은 매스 미디어를 통해서 오히려 더 강화되는 양상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민족’, 근대가 만들어 낸 이름

하지만 민족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현상도 아니고 영구 불멸의 탈역사적 주체는 더더욱 아니다.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 민족을 설명하고 분석하였다. 과거 혈연이나 지역 단위의 소규모 공동체와는 달리 민족은 서로 한번도 접해 보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과 인식의 기제를 통해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근대적 개념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겔너는 상기 저서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그에 따른 기능적 필요에 의해 민족이 생성되었다는 설명을 제시하였다. 자본주의의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위해서는 민족과 같이 커다란 단위의 대중 사회가 필요했고, 기술을 활용하는 생산양식은 대중적인 교육 제도를 필요로 했다는 말이다. 여기서도 다시 한번 민족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 졌다는 지적이 등장한다.

홉스봄은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에서 개념의 근대성과 역사성을 강조하는 것은 물론 대중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민족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추적하였다. 그는 민족주의 엘리트가 위로부터 강요하거나 확산시키는 민족의 개념 뿐 아니라 대중 속에서 아래로부터 형성되는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민족을 훨씬 장기적인 측면에서 조명하고 분석하는 스미스조차 근대 민족의 기초로 작용했던 전(前)근대의 ‘민족의 종족적 기원’을 강조하지만, 이는 하나의 재료로 사용된 것이지 그 자체가 민족이었다는 주장은 아니다. 대부분의 민족과 민족주의 연구자들은 이들 현상의 근대성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다.

이처럼 민족은 사람이 눈이 두 개이고 코가 하나이듯이 자연스런 속성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척 다양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근대라는 커다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성장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만, 실제로 지구상에는 존재하는 민족만큼이나 다양한 민족의 개념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0인 10색의 민족 개념

서구에서 민족을 논할 때 등장하는 두 가지 대표적인 모델은 프랑스와 독일이다.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상가 르낭은 『민족이란 무엇인가』에서 민족의 고갱이는 종족도 언어도 종교도 이익도 영토도 아니라고 역설하면서 ‘민족은 하나의 영혼이며 정신적인 원리’라고 주장하였다. 이 영혼과 정신은 ‘함께 공동의 삶을 계속하기를 명백하게 표명하는 욕구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공동의 문화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개의 정치적 단위로 분열되어 있었던 독일의 민족 개념은 혈통과 언어, 풍습과 전통을 중시한다. 프랑스의 의지에 기초한 민족보다 종족적인 의미가 더욱 강하게 담겨 있는 민족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이런 차이점은 전자의 개방적인 속지주의 국적(nationality)법과 후자의 폐쇄적이고 혈통적인 국적 부여 원칙에서 확인된다.

영국은 매우 이른 시기에 근대적 민족을 형성한 잉글랜드와 이에 어느 정도는 대립적인 입장에서 발전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 등으로 구성된 ‘다민족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역시 앵글로색슨계의 혈통적 문화적 동질성이 지배적인 입장에서 출발하였지만 지금은 다양한 인종과 종족으로 구성된 다문화적 민족이다. 영국이 영토적 기반을 가진 다민족이라면 미국은 인종·종족적 기반을 가진 다민족이라고 하겠다.

동아시아에서도 민족의 개념은 동질적이지 않다. 한국과 일본의 민족주의자들은 두 민족의 영구한 성격, 세계 ‘최고’에 가까운 민족 동질성들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오구마 에이지의 『일본단일민족신화의 기원』이 잘 드러내고 있듯이 일본은 팽창적 제국주의 시절 자신의 혼혈적·혼합적·다민족적 기원을 강조한 바 있다. 물론 타민족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 개념이 조작된 결과이다.

한국도 자민족의 장기적 성격과 동질성을 내세우지만 불과 분단 60여 년이 초래한 남북의 거리와 차이는 이 동질성에도 의문을 제기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최근에는 국가뿐 아니라 민족의 범위까지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규정·제한하는 경향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가변성과 유동성, 그리고 우연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은 한국과 일본과는 또 다른 민족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사실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은 청조에서 물려받은 영토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20세기에 고안해 낸 개념에 불과하다. 중국은 미국이나 영국과 비슷한 다민족 민족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영토성에 기반한 다민족 국가이기에 최근 티베트에서처럼 분열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국가 분단의 현실이 민족의 분화를 가져오는 대표적인 경우로는 타이완을 들 수 있다. 타이완은 한족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내성인(內省人)과 외성인(外省人)의 대립이 심각하게 나타났고 상대적으로 내성인을 중심으로 독립 성향이 등장하게 되었다. 종족적 문화적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국가 단위에 해당하는 민족주의의 생성이 이뤄진 모양이다. 쳔꽝싱은 이를 『제국의 눈』에서 ‘국족주의’라고 부른다.

유럽의 새 옷, ‘유럽 민족’의 탄생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기는 하지만 유럽연합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체(polity)는 이에 상응하는 유럽 민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가고 있다. 청색 바탕에 하얀 별이 그려진 깃발과 베토벤의 환희의 노래는 유럽 연합의 상징이다. 유럽 시민들은 5년마다 직접 투표를 통해 유럽 의회의 의원을 선출한다. 기독교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유럽 전체에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대륙적 규모의 정당이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인간적 얼굴의 자본주의’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며 미국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민족의 형성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기에 초보적인 유럽 민족의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정책과 정치 활동이 조직되는 현실이 지속된다면 유럽적 민족 정체성의 형성을 동반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인다. 민족은 그림자보다는 - 물론 조명이 여럿이면 그림자도 여럿이지만 - 갈아입거나 껴입을 수도 있는 옷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래서 한 사람이 스코틀랜드인이면서 영국인이고, 동시에 유럽인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대한민국인이며, 한반도인이고, 또 동아시아인일 수 있다.

조홍식 / 숭실대 교수, 정치외교학





[경희대 대학원보 159호] 민족주의란 특정한 역사, 문화, 언어, 혈통, 이익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고 국가를 열망하거나 유지하려는 정신적 태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생각’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공유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믿도록 교육되었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코리안은 단일민족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일본, 중국, 거란, 여진, 말갈, 심지어 아랍계 등의 피가 섞여 있다. 삼국 시대를 ‘우리’ 역사의 기원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백제가 살아남아서 ‘백제민국’이 되었다면 한국인들은 오늘날 충청도 일대의 지역을 ‘외국’으로 인식하고 충청도 사람들을 ‘다른’ 민족으로, 충청도 사투리를 ‘외국어’로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에 백제에게는 신라가 ‘한핏줄’이 아니라 당나라와 같은 외세였을 뿐이다. 오늘날 백제, 고구려, 신라는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인식된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삼국통일’이 아니라 ‘삼국병합’이었을 것이다. 역사의 우연과 현재의 관점을 과거로 투여하는 국사 덕에 오늘날 한국인들은 삼국을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인식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은 많은 이들이 오독하는 것처럼 그것이 실체가 없는 허구라서 그런 게 아니다. 민족 구성원을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못하면서도 그 구성원을 집단의 일원으로 인식하는 ‘상상력’ 때문이다. 국사, 국어 등을 통해서 이러한 상상력을 만들어내고 부추긴 것은 근대민족국가의 공통된 특성이다. 이런 이유로 근대 이전에 민족의식이 존재했다고 착각한다.

‘평등’ 전제한 근대 초기 민족주의는 진보적 사상

민족이란 의식은 ‘우리’의 형성에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구성원들의 평등 의식을 필요로 한다. 신분제의 철폐는 민족의식의 결정적인 전제가 된다. 가령 노비가 양반을 ‘우리’에 포함시켰을까? 양반이 상민이나 노비를 ‘우리’라고 느꼈을까? 임진왜란 초기 단계에 많은 노비들이 왜군 편에 가담하고 그 일부가 경복궁에 불을 지른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노비에게는 양반이 ‘우리’가 아니라 자신의 노동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이었을 뿐이다. “민족주의가 농민을 프랑스인으로 만들었다”는 유명한 얘기는 여기에도 해당된다. 한반도에서는 조선말 신분제 폐지와 일제의 침략으로 인한 민족의식의 발흥이 비로소 노비, 상민, 양반을 ‘조선인’으로 만든 것이다.

민족주의는 적어도 근대 초엽에는 매우 진보적인 사상이었다. 그것은 신분적 평등을 지지하고 왕조에 대항하는 이념적 동력이었다. 또한 20세기의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사회주의와 결합하여 제국주의적 자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원천이었다. 하지만 현재 민족주의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

차별과 은폐, 근대 이후 민족주의의 산물

앞서 얘기 했듯이 민족주의는 ‘우리’라는 의식을 만들어낸다. 동시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우리’ 밖에 서있는 ‘남’을 창출한다. 그래서 ‘우리민족’과 ‘타민족’이 생겨난다. 이 타자화는 평상시에는 타민족의 차별, 위기 시에는 타민족에 대한 제노사이드(인종학살)의 근거가 된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정당화된다. 한국 자본주의가 아류제국주의(sub-imperialism) 성격을 띠게 되면서 동남아시아 등에서 행하고 있는 착취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동질적 집단, 이익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오인’되면서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성별 계급 간 갈등과 모순을 은폐하는 기능을 맡게 된다.

‘우리민족’의 강조는 ‘내부’의 문제를 덮어버리고 지배계급의 특정한 이익을 ‘민족의 번영’으로 수용하도록 만든다. 외국에서 접하는 한국재벌의 광고에 감동하는 것은 이러 연유에서다. ‘민족=대기업=국가=사회=우리’라는 등식이 이미 자리 잡고 있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타자 역시 동질화된다. ‘미국=정부=사회=기업’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따라서 최근의 ‘검역주권’ 논란에서 보듯이 미국산 쇠고기 파동은 한국 vs. 미국의 문제로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한국의 수입업자와 미국 축산농 간의 동질성은 은폐된다. 다시 말해 세계자본주의체제에서 주변부의 중심부와 중심부의 중심부가 이해관계를 같이 할 가능성, 주변부의 주변부와 중심부의 주변부가 같은 이해관계를 가질 가능성은 숨겨진다. 민족을 기준으로 한 선 긋기는 실제 이익의 경계선과는 실제로는 매우 다르다는 얘기다.

민족주의는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집단주의다. 생명, 환경, 인권, 자유 등의 보편적 가치는 부차적인 것으로 전제된다. ‘우리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라면 한국내의 환경은 물론이고 외국의 저임금 노동 및 자연을 착취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 되고 만다. ‘국익’, ‘국력’,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라면 보편적 가치의 희생은 정당화된다. 또한 성, 계급, 지역 등에 따른 정체성 및 이익은 무시되거나 하위 의제로 서열화 된다. 하지만 여성주의자에게는 민족보다 젠더가, 노동자에게는 민족보다 계급이 더 중요한 범주가 될 수 있다. 장애인이나 동성애자에게는 미국이 제국주의가 아니라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적은 사회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러한 탈민족적 주체를 민족의 하위 단위로 포섭할 때 그것은 다중적인 주체를 억압하는 메커니즘이 된다. 민족을 앞장세울 때 그것은 민족의 ‘표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기재가 될 수 있다. 거기서 남성-부자-비장애인-이성애자-발전주의자들이 민족을 ‘대표’하게 되고 그들의 헤게모니는 여성-빈자-장애인-동성애자-생태주의자를 침묵케 한다. 후자는 ‘비민족’, ‘비국민’이 되고 만다. 우파적 민족주의는 물론이고 진보적 민족주의에서도 이러한 문제점은 쉽게 드러난다. 그것을 ‘일시적 부작용’이거나 ‘특수한 예’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얘기다.

‘민족’ 개념에 기반한 연대는 또 다른 선긋기

최근 세계화를 반대하는 진보진영에서는 신자유주의의 파고에 맞서서 싸우기 위해서는 되레 민족주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폐쇄적 민족주의건 ‘열린’ 민족주의건 그것의 본질은 배제 및 차별 그리고 은폐다. 민족주의를 소리 높여 외친다면 그것은 ‘민족=대기업(재벌)=국가’라는 등식을 더욱 강화할 뿐이며 선진국에서 요구되는 합리적 자본주의 효율성마저 뒷전으로 몰아놓고 한국사회에서 승자/강자 독식의 기재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금융위기 때 진보진영의 민족주의적 대응은 ‘내부’의 개혁에 대한 관심을 ‘미국의 음모’로 돌려놓음으로써 재벌을 되레 도와주지 않았던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어떤 길로 가야 하는가? ‘유럽연합’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민족적 정체성을 창출하는 게 아니라 근대적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국제적 정체성을 향해 가고 있지만 화폐통일까지 이루는 연합이 경제적으로 세계화와 어떤 관련을 맺을지는 아직도 애매하다. 반면 요즘 유행하는 동아시아 혹은 아시아 담론은 냉전체제의 유지와 보편적 가치에 대한 합의 부족으로 인해 길을 잃고 있다. 물론 다양한 집단 및 개인과 삶의 작은 테두리를 억압하는 민족주의로 퇴행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아니다. 여기서 다룰 수 없지만 민족주의적 개발독재가 파괴해버린 풀뿌리 작은 공동체를 복원하는 게 중요하다. 지금 요구되는 것은 국민국가와 세계화의 틀을 동시에 넘어서는 비민족적 작은 공동체를 살려내고 재구성하는 시민사회간의 국제주의적 연대다. 사람, 자본, 상품이 국경을 넘나들며 전 지구를 순환하고 있는 상황에서 월경적 주체로서 여성과 생태주의자들이 맡을 역할이 매우 커 보인다. 민족/국가적 선 긋기는 이제 한계점에 도달했다.

권혁범 / 대전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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