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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몰락하자, 동유럽과 러시아 등에서는 파시스트 세력들이 힘을 얻기도 했다. 통일독일의 동부지역에서는 네오나치 세력들이 등장했고, 헝가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한 호르티 미클라시 옹호론자들이 등장했다. 해체된 유고슬라비아 연방 국가들에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로 악명을 떨쳤던 우스타샤 옹호론자들이 등장했고, 러시아에서는 나치에 협력한 변절자 블라소프를 옹호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또한, 우크라이나에서도 나치에 협력한 스테판 반데라를 옹호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사실 동유럽 및 소련 사회주의권 붕괴는 각국의 자본주의화만 촉진시킨 것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파시스트들을 옹호하는 움직임과 정치적 폭력화 및 테러도 가속화했다. 마찬가지로 1989년 차우셰스쿠가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이후 루마니아도 자본주의화 됐다. 그 과정에서 루마니아 또한 파시즘 운동이 다시 나타났다. 루마니아의 파시스트들이 극도로 미화한 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이온 안토네스쿠(Ion Antonescu)다.


이온 안토네스쿠는 1882년 루마니아 피테슈티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던 그는 이후 장교가 되었고 1907년에 루마니아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를 진압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전후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군사적 간섭에도 참가하여 수도 부다페스트를 함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안토네스쿠는 승승장구하여 1933년 루마니아의 육군참모총장 자리까지 오르게 됐으며, 1937년에는 루마니아의 국방장관 자리까지 올랐다. 당시 루마니아는 카를 2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안토네스쿠는 그들과 갈등하다 국가전복 혐의로 투옥되었다.


안토네스쿠는 이후 석방됐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중이던 1940년 9월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사실 안토네스쿠는 1930년대부터 친히틀러·친파시즘 성향을 보였다. 안토네스쿠는 1938년도 헌법을 폐지하고 입법권과 행정권을 자신의 손에 넣고 히틀러를 따라 자신을 총통이라 칭했다. 안토네스쿠는 1940 9월에서 10월 사이 독일군의 루마니아 주둔을 승인했으며, 1941년 2월에는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중심축이 된 추축국 동맹에 가입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안토네스쿠는 그 다음날 소련에 대한 침략전쟁에 동참했다.


물론 루마니아의 군대는 소련군에게 상대가 안됐다. 1942년부터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루마니아군을 격파했다. 루마니아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10~20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잃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에도 루마니아는 지속적으로 독일군 편에 섰다. 1944년 6월 15일 기준으로 보아도 최소 6만 명 이상의 독일군이 루마니아에 있었다. 안토네스쿠는 1944년 8월 15일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독일군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을 맹세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패할 것을 안 미하이 1세는 진영을 바꿔 8월 23일 궁정쿠데타를 일으켜 친추축국 세력을 숙청하고 나치 독일에 대한 단교를 선언했다. 비슷한 시기 지하로 숨었던 루마니아 내의 공산주의자들도 봉기를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이들을 지원하는 소련군은 루마니아를 해방했다. 이로써 루마니아의 파시즘 체제는 무너졌다. 안토네스쿠는 총리직에서 해임됐으며, 그는 소련에 의해 체포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안토네스쿠는 소련으로 보내졌으며, 유대인 학살과 독일 협력에 대한 죄를 물어 1946년 6월 1일 총살됐다. 


안토네스쿠가 통치하던 시절 루마니아에서도 홀로코스트가 자행됐다. 28만 명에서 4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고,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 그리고 트란스니스트리아 등에서 학살이 자행됐다. 물론 홀로코스트의 경우 폴란드(300만 명)나, 우크라이나(85~160만 명), 벨라루스(55~80만 명), 헝가리(56만 명) 등이 희생자 숫자가 더 높은 수치이기는 하나, 그 당시 루마니아에 살던 유대인 인구가 75만 명 정도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안토네스쿠의 홀로코스트 행위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루마니아 내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은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독일군마저도 충격 받았을 정도의 잔혹성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1941년 10월 23일 지뢰받에서 루마니아군 본부 중대가 몰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유대인 학살의 신호탄이었다. 루마니아군 본부 중대가 몰살당한 다음날 루마니아군은 네 개의 커다란 창고에 유대인들을 쑤셔넣은 다음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질러 2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불태워 학살했다. 이렇게 해서 나치 독일은 안토네스쿠가 이끄는 루마니아 군대에게 베사라비아 지역을 맡겨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게 했다. 심지어 이 루마니아 군대는 구타와 고문 강간도 일삼았으며, 유대인 소녀들을 뽑아다가 그들의 성기를 잘라낸 다음 난교 파티를 벌였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안토네스쿠 치하에서 일어난 루마니아의 홀로코스트는 스테판 반데라의 OUN이 저지른 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그런 극악무도한 통치자이자 학살자인 이온 안토네스쿠가 냉전 이후 루마니아에서 찬양하는 이들이 나타난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봐야할까? 우크라이나에서 스테판 반데라가 찬양받고 있는 현상은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벌어지는 파시즘의 흐름을 너무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온 안토네스쿠에 대해 쓰며 이와 같은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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