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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 NL계열 운동권 사이에서 북한을 알기 위해 읽었던 책이 있다. 그 책이 바로 독일인 작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가 쓴 『또 하나의 祖國 - 루이제 린저의 북한방문기』라는 책이다. 실제로 루이제 린저는 박정희 정권 시절 서독에서 민주화 운동을 진행하던 윤이상이라는 음악가와 두터운 친분이 있었고, 민전이 전개한 민주화 운동에 관여하기도 했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 시기에도 린저는 남한의 민주화 운동에 깊은 관심과 지지를 보였다. 그와 더불어 린저는 1980년부터 무려 10여 차례나 북한을 방문했고, 당시 북한의 지도자이던 김일성과도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나 또한 이 책을 어렵게 인터넷을 통해 구매했고, 완독은 아니어도 몇몇 부분을 조금씩 읽어봤다.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던 내용은 북한의 교화소 관련 내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인권유린으로 드는 소재 중 하나가 이른바 정치범 수용소 관련한 내용이다. 이른바 미국이나 한국의 극우들이 생각하고 묘사하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모습은 과거 솔제니친이 묘사한 스탈린 시절 소련의 굴라그나 빅터 프랭클이 묘사한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 같은 곳이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이른바 서방 진영에서 영향력이 워낙 강해서 그런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박연미에 의해서 증언되고 있다.

 

즉, 서구에서 그런 내러티브를 가지고 보는 북한의 수용소에 대해 ‘창 살 없는 교화소’라고 책에 대놓고 묘사했으니 나로서는 상당히 신선했다. 물론 앞서 언급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묘사는 미국이나 제1세계의 프로파간다라 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나 인권유린을 묘사하는 내러티브가 과거 냉전시기 미국이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나 산디니스타가 통치하는 니카라과의 모습을 악마화할 때 사용하는 내러티브와 너무나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 친미국가들이 자행된 인권 유린들, 예를 들어 피노체트 하의 칠레의 강제 수용소 등은 항상 외면하게 만든다는 문제점도 분명히 있다. 그런 점에서 글쓴이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운운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본다.

 

주제를 다시 루이제 린저로 돌리자면, 그녀가 남긴 북한 관련 기록은 여러모로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교화소 문제도 그렇고, 그녀가 남긴 기록은 엄밀히 말해 그녀가 북한에서 직접 보고 겪은 것을 얘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린저의 기록이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을 무려 10차례나 방문하여 자신이 본 것을 기록으로 상세하게 남겼기 때문이다. 루이제 린저가 본 북한의 이미지는 이른바 ‘밝은’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독재국가다. 아래의 린저의 발언을 통해 보도록 하자.

 

“저는 북한이 어두운 독재국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밝은 독재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김일성 주석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또 모든 것을 감독하는, 그래서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며 모든 생활양식을 규정하는 가장이자 어버이로 여겨집니다.”

 

즉, 린저가 보기에 북한 사회는 분명 한 지도자가 영구적으로 통치하는 독재 국가이지만, 그녀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소련의 스탈린 체제나 그런 체제를 이식받은 동유럽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린저가 보기에 북한은 서구 보다 가난하더라도 인민들이 어둡지 않고 밝고 행복하게 사는 사회였다. 그리고 그녀는 북한에서 맛본 과일과 아채를 “순수한 그대로의 맛, 기름지고 무해한 북한의 토양에서 우러나온 맛”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북한의 공기게 맑다고 얘기했다. 린저는 북한을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도시들은 녹지대로 채워지고, 화학공장들은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현대적인 정화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즉, 린저는 북한 사회가 수질오염이나 대기오염이 서구보다 훨씬 덜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린저가 이와 같은 관점을 가진 것은 그녀가 서독의 진보정당인 녹색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던 그녀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아무래도 1960년대 68운동의 흐름 속에서 린저는 친환경주의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린저가 주목한 밝은 독재라는 개념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린저가 북한에 대해 독재라고 분석한 두 가지 개념은 다음과 같이 있다. 하나는 개인숭배를 포함해서 북한의 모든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면모를 유교적 전통 때문이라고 봤다. 즉, ‘어버이 김일성 수령’이라는 식으로 지도자를 어버이처럼 존경하는 것을 전통적인 유교의 산물이라 본 것이다.

 

두 번째는 북한이 평화를 원하지만 외부로부터의 위협, 즉, 미국 제국주의의 군사적 무력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린저는 분석했다. 미국은 핵무력을 포함한 온갖 군사적 무력으로 북한을 압박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적인 자유가 제한받는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두 가지 지점을 통해 린저는 북한체제가 개성이 용인되지 않은 독재국가라 봤다. 그러나 린저가 보기에 북한 사회는 비록 전체주의적 면모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강요, 구금, 추방이 보이지 않는 사회였다. 또한, 린저는 권력자에 대한 국민의 불안과 국민에 대한 권력자의 불안이 만연하는 현상도 북한에서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핸 린저는 북한의 교화소를 직접 방문했고, 거기서 담장, 감시탑, 가시철조망, 쇠창살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린저는 이에 대해 유스호스텔 같은 곳이었다고 묘사하기까지 했다.

 

사실 북한의 수용소는 교화소가 있고, 정치범 관리소가 따로 있다. 교화소는 주로 재교육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북한 측의 폭력이 전혀 없다고 하면 빈말이겠으나, 북한의 방침 자체가 주로 교화 및 갱생에 맞춰진 것은 사실이다. 물론 시설의 열악함이나 그 내부에서의 폭력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제1세계가 묘사하는 이른바 아우슈비츠와 같은 정치범 수용소식 묘사는 거짓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글쓴이의 경우 실제로 교화소에 갔다 온 한 탈북자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1990년대 교화소의 경우 구타와 같은 폭력이 난무했다고 한다. 그 사람의 경우 1~2개월 교화소 생활을 하다가 탈북을 했는데, 글쓴이는 이 부분이 아주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마져도 일각에서 떠드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어쩌구는 허구라고 말했으니, 글쓴이는 신동혁이가 묘사한 정치범 수용소 어쩌구는 거짓이라고 본다.

 

물론 이와 같은 증언과는 상충되는 또 다른 근거도 있다. 미국 시민 매튜 토드 밀러라는 사람은 2014년 4월에 그 나라에 적대적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6년의 노동형이 선고되어, 북한 교화소에서 212일간 감옥살이를 했다. 석방된 이후 밀러는 뜻밖의 좋은 대우에 자신도 놀랐다고 얘기했으며, 감옥에서 자신의 아이패드와 아이폰으로 음악을 듣도록 허용했다고 증언하기 까지 했다. 또한 밀러는 북한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자신의 공개 사과가 강요된 것이었다는 서방의 보도들에 나타나는 광범위한 추정을 부인하고 자신은 전적으로 진실했다고 말했다. 석방 전후 이뤄진 인터뷰에서 밀러는 노동교화소에서의 상황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부분 땅을 파고, 돌을 옮기고, 잡초를 제거하는 등 농사일을 한다.”라면서, 구타나 폭행 같은 것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물론 김일성 시대와 김정은 시대의 교화소 시설은 분명 다를 테지만, 중요한 것은 기존의 반북 내러티브만으로 북한의 처벌과 교화를 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교화소에 들어가 교화가 되어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제1세계가 퍼뜨린 북한의 수용소 내러티브는 신중한 검증이 필요한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교화소의 실상이 어떻든 간에 루이제 린저가 본 북한의 모습은 독재국가이지만 법과 물리력에 의한 강제로 통제 및 검열하는 국가는 아니었다. 즉, 개개인에게 내면화된 자기통제와 자기검열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이제 린저가 북한을 한편으로는 부정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또는 자본주의 보다 나은 점이 있는 사회로 본 데에는 당시 68혁명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구에서 시작된 68운동은 신세대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서구 좌파들은 소련이나 동유럽 체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당시 체게바라나 호찌민 그리고 마오쩌둥 등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린저 또한 그러한 인식 하에서 북한과 김일성을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즉 그런 점에서 북한에 대한 린저의 인식과 사유는 긍정과 오류를 떠나 서구 지성사의 흐름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성보, 「루이제 린저의 동양 호기심과 ‘밝은 독재’ 국가 북한, 그리고 윤이상」, 『동방학지』 202,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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