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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붉은광장

(요시프 브로즈 티토, 그는 현재는 해체된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유럽의 대다수 국가를 침략하여 점령했다.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은 전쟁 초기 유럽 정복에 착수했다. 폴란드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나치독일은 1940년 덴마크와 노르웨이,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고 프랑스까지 점령했고, 덩케르크에서 철수한 영국을 상대로 대규모 항공기 공습을 개시했다. 그 이후 1941년 나치 독일은 알바니아와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그리스를 침공하여 점령했고, 그해 4월 6개의 연방이 모인 국가 유고슬라비아(Yugoslavia)를 점령했다. 유고슬라비아는 아돌프 히틀러의 군대에 굴복한 13번째 국가가 되었다.

(나치의 유고슬라비아 침략, 1941년 4월 나치는 유고슬라비아를 침략했다. 그 결과 유고슬라비아는 나치독일에게 항복한 13번째 나라가 되었다.)


(당시 루프트바페의 폭격을 받은 베오그라드)

 

1941년 4월 6일 루프트바페(독일공군)의 지원을 받은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수도 베오그라드를 공습했다. ‘보복작전’이라고 명명한 공습으로 최소 5,000명에서 17,000명의 사상자가 속출했고, 나치의 침략 11일 만에 유고슬라비아는 독일군, 헝가리군, 불가리아군 그리고 이탈리아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러자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한 인물은 파시스트의 침략에 맞서 군대를 결성하고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그가 바로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였다.

(나치독일군에게 항복하는 유고슬라비아 정규군)

 

티토는 1941년 6월 이른바 파르티잔 (Partisan) 즉 ‘빨치산’이라 알려진 반나치 게릴라 전투 집단을 결성했다. 그는 빨치산 부대를 직접 지휘하고,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티토가 결성한 빨치산은 초기엔 도끼, 몽둥이, 엽총 정도로 무장한 부대로 무장력이 형편없었다. 그러나 파르티잔 투쟁을 통해 세력을 넓혔고, 전쟁이 끝날 무렵엔 사실상 정규군 수준으로 성장했다. 또한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은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이 빨치산은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민족·종교·언어를 초월하여 연합한 집단이었고, 다수의 여성대원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단순히 사무실과 병원에서 일하는 것만이 아니라 남성대원들과 똑같이 무기 사용법을 훈련받고 똑같이 전투에 참여했다. 이런 점에서 티토의 파르티잔은 민족과 언어, 종교 그리고 성별을 초월했다.

(여성 파르티잔 대원,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은 성별과 종교 그리고 인종을 초월했다.)

 

빨치산 설립 초기인 1941년 6월 티토는 무전기를 사용하여 모스크바와 연락할 수 있었지만, 당시 소련 또한 독일의 침공을 받고 있었기에 티토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결국 티토의 빨치산은 소련의 지원 없이 전쟁 초기 외로운 투쟁을 이어나가야 했다. 1941년 여름이 끝날 무렵 티토는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떠나 빨치산 부대를 찾아가 그들이 해방시킨 산악 지방의 소도시 스톨리체에 본부를 세웠다. 이 시기 그가 이끄는 빨치산 집단은 그 밖에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및 몬테네그로에서 나치에 맞서 투쟁을 벌였는데, 1941년 10월 빨치산 여단이 베오그라드 근처에 있는 크라구예바츠 근교의 독일군 탄약창고를 기습하여 26명의 독일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체트니크군, 나치의 침공 이후 이에 저항하는 또 다른 세력이 있었다. 그게 바로 체트니크군이다. 그러나 체트니크군은 친서방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했고, 빨치산과의 협력을 거부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나치나 파시스트 조직인 우스타샤와 협력하여 빨치산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자 독일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2,600여 명의 민간인을 기관총으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치 치하 초기 유고슬라비아에선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체트니크라는 왕당파측 저항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 사건 이후 티토의 빨치산과 협력하는 것을 꺼렸다. 당시 영국과 미국은 언론서 체트니크군의 활약만 다뤘는데, 이들이 동조하던 체트니크는 11월 1일 독일군을 도와 빨치산을 소탕하는 작전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티토는 독일군과 세르비아군, 체트니크군까지 맞서 싸우게 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탈리아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작전을 펼쳤다. 다른 전선에서도 그랬듯이 이탈리아군은 유고슬라비아에서도 무능했다.)

 

1942년 1월 독일군은 티토 빨치산에 대한 제1차 공세를 전개할 준비를 완료했다. 이들은 우스타샤군의 도움을 받아 빨치산을 남쪽의 포차로 내모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포차는 이탈리아측이 점령하고 있었다. 물론 티토는 초기에 이탈리아측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탈리아측은 폭격기의 지원을 받는 기계화 부대를 동원하고, 이쪽 지역에서 몬테네그로인들이 총구를 빨치산쪽으로 돌리면서 퇴색에 직면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몸소 몬테네그로로 간 그는 빨치산을 지휘했고, 겨울이 끝나갈 무렵 파시스트들로부터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재탈환하기에 이른다. 당시 티토는 스탈린에게 더 많은 물질적 원조를 호소했지만, 정신적인 지원은 있었지만 물질적인 지원은 없었다.

(빨치산 부대를 사열하는 지도자 티토)

 

이에 따라 티토의 부대는 1942년 5월 치열한 전투 끝에 한 차례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보스니아 경계로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티토의 군대는 또 다른 시련에 직면하는데 바로 굶주림이었다. 따라서 티토는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고, 서부 보스니아의 다른 빨치산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320km에 걸친 4개월의 대장정을 실행했고,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패배한 적군들로부터 필수식량과 탄약을 노획했다.

(1943년 당시 지휘본부에서 찍은 티토의 사진)

 

이러한 티토의 활약으로 빨치산의 영토는 넓어졌고, 크로아티아 주 경계 지역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전황이 티토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것이다. 이때도 티토는 스탈린으로부터 지원을 받고자 했지만, 안타깝게도 없었다. 이 과정에서 티토는 1942년 11월 유고슬라비아 반파시스트 위원회를 결성함으로써 빨치산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한편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유고에서의 빨치산을 소탕해야 한다 생각했다.

(1944년 동료들과 함께 있는 티토)

 

그 당시 유고슬라비아에는 독일군 10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연합군이 유고슬라비아에 상륙하는 것과 상륙한 연합군이 티토의 빨치산과 협력하는 일이었다. 만약에 연합군이 유고슬라비아에 상륙하여 게릴라군과 손을 잡게 된다면 히틀러로선 굉장히 큰 골치였다. 따라서 1943년 1월에 나치는 이른바 ‘백색작전(Operation Weiss)’을 개시했다. 백색작전은 티토의 빨치산이 4차 공세라 불렸던 작전으로 독일군 2개 사단, 이탈리아군 4개 사단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파시스트 세력인 우스타샤군 2개 사단이 동원되었다. 나치의 백색작전 당시 티토는 네레트바 강을 건너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체트니크군을 대파하는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백색작전 당시 동원된 추축국의 탱크)

 

1943년 3월 빨치산 공병대가 네레트바 강에 걸쳐 있는 여러 개의 교량을 폭파하고,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 제1, 제2 그리고 7사단이 이 작전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이탈리아군으로부터 탈취한 15대의 전차를 앞세워 20km에 걸쳐 전선에 포진하고 있는 독일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이에 맞서 ‘흑색 작전’이라는 빨치산 토벌 작전을 전개해 2만 명의 빨치산에 대항하여 독일·이탈리아·불가리아군 및 크로아티아 괴뢰 정부군으로 구성된 10만 병력을 동원했다. 여기서 독일군은 잔인무도한 작전과 학살을 벌였고, 티토의 빨치산은 다시 한 번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티토 또한 여기서 독일군에 체포되거나 사살될 수 있었지만, 다행히도 이들은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고, 보스니아로 들어가 독일군의 추격을 따돌렸다. 이후 티토는 전술을 바꾸어 빨치산 부대를 작은 규모의 집단으로 세분해서 소규모 지역에 국한하여 작전을 펴게 했으며, 독일군에게 빨치산을 일거에 전멸시킬 기회를 다시는 더 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물론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의 대부분 지역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지만, 티토의 생존만으로도 큰 승리였고,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미국과 영국은 체트니크의 미하일로비치가 아니라 티토를 유고슬라비아의 항독 지도자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제2차 세계대전 초중기 티토의 빨치산은 서방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정보가 들어오더라도 런던에 망명중인 페테르 국왕 정부의 검열을 거치면서 들어왔다. 그러나 추축국인 이탈리아와 독일의 사정은 달랐다. 이들이 나누는 메시지에는 티토의 언급이 많았다. 이걸 해독한 영국측은 독일군의 제5차 공격이 진행되던 1943년 5월 네 명의 영국군 장교들을 몬테네그로에 잠입시켜, 티토의 빨치산과 접촉했다. 이후 영국의 수상 처칠이 여기에 개입했고, 육군 준장 피츠로이 매클린을 유고슬라비아로 보낸다. 이렇게 되면서 영국의 처칠은 티토에 대해 보다 정확한 평가를 내리게 되었다.

 

1943년 7월 영미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섬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이탈리아 본토에 진격하게 되면서 무솔리니는 몰락에 직면했다. 무솔리니 몰락 이후엔 독일군이 이탈리아에서 전권을 주도했다. 티토는 무솔리니가 전쟁에서 제거되는 기회를 틈타 이탈리아군이 점령했던 유고슬라비아 영토를 장악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몇 달 만에 유고슬라비아의 대부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유고슬라비아의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 내 독일군 주둔 병력을 20만 명으로 증강했다. 그 외에 불가리아, 세르비아 및 크로아티아군을 포함하여 16만 명을 합치면 총 36만 명의 추축국 측 군대가 빨치산을 추격했다.

 

나치 독일은 36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빨치산에 대한 제6차 공격인 ‘번개 작전’을 개시했다.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한 독일군은 이 같은 수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과거 이탈리아군이 차지했던 점령 지역을 재탈환하고, 보스니아로 밀고 들어갔다. 그 무렵인 1943년 11월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은 테헤란에서 히틀러를 몰락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논의했고, 서유럽에 대한 제2전선 구축과 더불어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작전에 관해서도 논의했다. 여기서 연합국은 티토에게 물자를 보내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43년 11월 말 티토는 보스니아의 도시 야이체에서 ‘유고슬라비아 민족 해방 위원회’라고 일컫는 공산주의 정부를 구성하여 왕정에 대체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독일군의 제6차 공세인 ‘번개 작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와중의 일이었고, 이 회의에서 “티토를 유고슬라비아군 원수로 임명한다”는 내용도 선포되었다.

(티토와 처칠, 1944년 당시 티토와 처칠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회담을 가졌다. 생각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전개되었다고 한다.)

 

독일군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독일군은 공군과 기갑부대를 동원하여 티토를 야이체에서 몰아냈다. 1944년 2월 독일군의 공격은 흐지부지되었다. 이번에도 독일군은 티토를 생포하는 데 실패했다. 이후 티토는 산악 지대로 나와 본부를 드르바르 시 부근의 한 동굴로 옮겼고, 여기서 연합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 받게 된다. 유고의 지원에 비적극적이던 소련도 지원에 나섰다. 한편 1944년 5월 독일군은 티토가 있던 동굴에 대해 공수 부대 공격을 감행했다. 이것이 ‘기사의 이동 작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토는 여기서도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영국은 나치하고 일부 협력하던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와 결별하고, 티토를 승인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는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티토는 연합국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완전히 인정받게 되었다.

 

1944년 여름 그는 영국의 처칠과 소련의 스탈린하고 회담을 가졌다. 처칠과는 친근감 있는 분위기에서 회담이 이어진 반면, 스탈린과의 화담은 아니었다. 티토는 스탈린의 주장을 일방적인 명령으로 인식했고, 그 명령에 반대하기도 했다. 이후 티토가 귀국했을 때,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북쪽으로 후퇴했다. 1944년 9월 중순에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해방시키고 유고슬라비아 국경으로부터 불과 몇 마일 밖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10월 1일에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유고슬라비아에 입성했다.

(1944년 10월 베오그라드를 해방시킨 티토의 빨치산과 소련의 붉은 군대)

 

티토 휘하의 다프체비치와 포포비치의 군대는 소련의 지상군 지원과 미군의 공중 지원 아래 베오그라드로 접근했고, 시가전을 치러 수도 베오그라드를 해방시켰다. 1944년 10월 20일 독일군 16,000명이 죽고 8,000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1주일간 치열한 시가전 끝에 마지막 독일군 거점이 유고슬라비아 빨치산 제1 프롤레타리아 여단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에 따라 독일군이 후퇴하자 세르비아인과 체트니크군 및 우스타샤 지지자들도 함께 달아났다. 이렇게 해서 베오그라드가 해방된 것이다.

(베오그라드 해방 당시를 제현한 그림, 소련의 T-34전차에 탄 병사가 유고슬라비아 깃발과 소련 깃발을 흔드는 것이 인상적이다.)

 

전쟁 과정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엄청난 피해를 봤다. 1942년 1월 나치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유대인들을 독일의 점령지 폴란드의 가스실에서 처치해야 한다고 제안한 반제회의”가 있을 때까지 대략 25만 명 이상의 세르비아인, 유대인 그리고 집시들이 크로아티아에서 죽어나갔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유고슬라비아에서 죽은 사람들은 역사학자들의 간추려 본 바에 의하면 최소 33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많게는 70만 명 이상이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또한 1941년 당시 12,000명이었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 중 9,000명이 전쟁 기간 동안 죽었고, 생존자 3,000명도 친구, 동료, 남편, 아내, 가족들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나치의 침략은 참혹했다.

(티토와 스탈린, 1945년 5월 전승기념 퍼레이드에서 참석한 티토는 스탈린을 만났다.)

 

소련군과 티토의 빨치산이 수도 베오그라드를 해방시키자 독일군은 1944년 겨울 동안 크로아티아 북부에서 버티는 신세가 되었다. 1945년에 접어선 유고슬라비아 땅에서 완전히 후퇴했다. 1945년 초 티토가 이끄는 반파시스 위원회가 최고 입법 기구가 되고, 행정부는 군주 정부와 공산당 대표가 공동 참여했다. 티토가 수상을 슈바시치가 외상을 맡게 되었다. 이 타협안은 영국과 소련의 승인을 얻었다. 1945년 유고슬라비아의 인민해방군은 트리에스테로 진격했다.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5월 1일 오전 9시 트리에스테에 무사히 입성했다. 연합군의 선봉이었던 뉴질랜드 대대가 그날 오후 5시에 도착했고, 5월 3일에는 영국군 주력부대가 밀려들어왔다.

 

소련군이 베를린을 함락시킨지 일주일 후 티토는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베오그라드에서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공격이 시작된 지 49개월 3일째가 되는 오늘, 유럽의 침략자 독일이 항복을 했습니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나치로부터 해방되었고,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참고자료

 

『인물로 읽는 세계사 7 티토』, 루프 시스먼, 대현출판사, 1993

 

『티토,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 재스퍼 리들리, 을유문화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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