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생태로 다시 살아나는 자연을 기대한다.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는 숲속에 살고 있다. 이 그림책의 화자는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가 ‘굉장히 크고 무섭게 생겼’다고 말한다. 나는 이 문장이 쓰인 그림책의 페이지에서 고개를 갸우뚱했어야 했다. 무섭다는 표현에 공감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육 아저씨는 다소 험악해 보이지만 익살스러움이 뚱보 아줌마는 둔해 보이면서 상처를 가진 이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고집스러워 보이는 검은 색의 긴 머리카락과 거대하고 완만하게 둥근 몸의 뚱보 아줌마에게 제 안에 숨겨버린 어떤 욕구가 있는 듯해서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나는 궁금해졌다.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는 왜 숲에 사는 걸까? 뚱보 아줌마는 원래부터 개미들을 밟을까봐, 노심초사하며 뒤뚱뒤뚱 걸었을까?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는 철저하게 이익에 우선한 현실에서의 삶을 감당하지 못 하고, 혹은 버리고 숲속으로 간 것은 아닐까? 작은 것들을 위할 줄 아는 뚱보 아줌마를 지켜줄 수 있는 근육 아저씨가 있어 아 참 다행이다,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근육 아저씨는 뚱보 아줌마를 만나 여리고 여린 것들을 보살필 수 있는 마음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다 문득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는 자연 그 자체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한하운의 <전라도 길>이라는 시에는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이라는 시구가 있다. 황톳길은 건강을 상징하지만 그 이면엔 피의 땅이라는 역사적 속사정이 있기도 하다. 전라도 길에 깃든 황톳길의 붉은색의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의 붉은 피부와 중첩 되었다. 아픔이 깃든 건강한 땅의 이미지를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에서 만난 것이다.
울퉁불퉁한 근육 아저씨의 몸과 풍만하고 동근 한 뚱보 아줌마의 몸은 변화무쌍하지만 늘 세상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자연으로 은유되기에 충분했다. 다친 새를 치료해주는 아저씨와 개미들의 행렬을 방해하지 않은 아줌마 그리고 이런 보살핌 덕에 다시 또 새와 개미의 보호와 배려를 받고 있는 두 사람의 삶이 상호 순환되는 자연의 이치처럼 느껴졌던 것.
둘은 굉장히 크게 무섭게 생겼지.
자연은 굉장히 크고 무섭지
크고 무섭게 생겼다 해서 해로운 것은 아니지, 다 우리들의 편견이지.
그렇지.
뚱보 아줌마가 나팔을 불며 나타난다.
몸집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두 발 자전거를 타고 있다.
길을 가던 개미들이 뚱보 아줌마를 비켜 양 갈래로 갈라진다.
개미들을 밟지 않기 위해 뒤뚱뒤뚱 걸어가던 뚱보아줌마를 위한 배려다.
뚱보 아줌마는 이제 멈추지 않고 가던 길을 갈 수 있다.
<<근육 아저씨와 뚱보 아줌마>>의 마지막 장면이다.

어쩐지 침울해보였던 뚱보 아줌마가 마지막에 나팔을 불며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는 장면은, 숲속에서 아이스런 생명력을 얻어 한층 건강해질 것을 암시하는 듯 즐겁기까지 하다. 휴, 다행이야, 라는 안도의 숨을 쉰다. 우리의 아프고 침울한 자연이 건강하고, 유연하게 다시 되살아나는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 그림책이 크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