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극적인 도파민이나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 주를 이루는 여느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와 달리, 제1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에케 호모』는 불친절할 정도로 여백을 두고 잔잔하게 두 사람의 여정을 따라간다. 인류의 99%가 사라진 세계, 살아남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한 문명의 재건일까, 아니면 단 한 사람을 향한 다정함일까.
소설 전체를 관통하며 반복되는 문장이 있다. "너희들은 변하지 않아." 인류의 99%가 사라지는 대재앙인 '강림'을 겪었음에도, 살아남은 인간들은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프라임을 신으로 숭배하여 종교를 만들고, 누군가는 번식과 재건에 집착하며, 또 누군가는 멸망한 세상의 법과 질서가 사라진 틈을 타 가장 약한 여성과 아이를 향해 추악한 폭력을 휘두른다.
인간의 욕망과 야만성은 종말 앞에서도 개과천선하지 않는다. 노먼의 말처럼 "아흔아홉 명이 우물을 깨끗하게 써도 한 명이 거기에 독을 풀면 이제 그 물은 아무도 마실 수 없게 되"(79)는 법이다. 개별적인 다수의 선의와 무관하게 존재 자체로 시스템을 오염시키는 독극물 같은 사람은 반드시 있기 마련인지라 여전히 절망적인 비극이 되풀이 된다.
성서에서 예수를 향한 조롱의 말이자, 니체가 인간에 관해 질문한 책의 제목인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 하지만 서브를 지키는 보호자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노먼(No Man)'이다. 독자는 이 사람을 보라는 제목 하에서 노먼의 행동과 그들의 여정을 계속 따라가게 된다. 노먼은 황폐해진 세상에서 서브에게 생명에 대한 윤리나 생존하는 방법들을 가르치고, 단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어린 서브에게 보여주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법도 윤리도 무너진 세계에서 서브의 손을 잡고 엑스포로 향하는 노먼의 등은 다정과 책임감이라는 사랑의 형태를 띄고 있어, 독자에게 "인간으로 산다는 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곱씹게 만든다.
그리고 이 무너진 세계의 끝에서, 서브는 무용한 물건에 불과해보이는 책을 모으기 시작한다. 빵 한 조각, 기계 부품 하나가 생사를 가르는 폐허 속에서, 당장의 생존이 중요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종이 뭉치인 책은 가장 무용한 물건이다. 이 역시 어쩌면 사랑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추악함으로 오염된 인류일지라도 그들이 한때 남겨놓았던 가장 아름다운 감정과 문명의 흔적을 잊지 않으려는 또 다른 형태의 사랑으로 읽혔다.
그러므로 이 책은 두 가지의 사랑을 말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사랑과 사람이 인류라는 종의 흔적을 기억하기 위해 모으는 거대한 사랑. 추악함과 폭력으로 가득했던 오염된 우물 속에서도 인류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행위. 그것은 문명 재건이라는 거창하고 오만한 껍데기를 벗겨내고서야 드러나는 사랑의 본질이자,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지막까지 지켜내야하는 유산이 아닐까.
+ 아니 더 쓰고 싶은데 솔직히 너무 스포일러라 쓸 수가 없고 근데 이 스포일러를 알아야 이 책이 심장에 콱 박혀버리는데 아주 진짜 환장하겠다 이거예요. 스포 발사해버리고 글 무한정 확장해버리고 싶음
++ 성폭행 장면에 대해서는 뭐... 다른 책처럼 이게 포르노나 욕구 배설의 느낌이 나지는 않고 건조하게 쓰레기같은 인간을 표현했다고 생각해서...그러나 심사평처럼 왜 위원들이 긴 토론을 했을지는 알 것 같음. 어쨌든 서브는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그냥 읽는 내내 저 새끼를 죽여줘 프라에몽🔪 이런 생각만 함
+++ 내가 읽은 그 어떤 아포칼립스 책과는 궤가 달라서 너무너무너무 좋았음 진짜 독특한 책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