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400 | "내 인생을 살고 싶었어. 그 기억들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었어. 하지만 그거 알아? 기억은 지워지지 않아. 게다가 엡스타인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빠져나갔어. 나는 지금 너무 화가 나.
얼마 전 '엡스타인 파일'이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다. 도널드 트럼프와 빌 클린턴 등 미국의 권력자들을 비롯해 빌 게이츠, 영국의 앤드루 왕자 등의 남성들이 그의 아동 성범죄와 얽힌 가해자와 동조자로 지목된 사건들.
『노바디스 걸』은 제프리 엡스타인 사건의 피해자로 알려진 버지니아 주프레의 회고록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엡스타인을 만난 순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훨씬 이전의 시간, 마땅히 보호받아야 했던 어린 시절이 어떻게 조금씩 무너져 갔는지를 보여주는 데서 출발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한 소녀가 얼마나 쉽게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지, 그리고 누군가(특히 여성)의 취약함이 어떻게 또 다른 폭력의 통로가 되는지를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경험은 단순한 분노로 끝나지 않는다. 사건 자체의 잔혹함도 분명하지만, 더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폭력이 가능해지는 환경과 침묵이다. 누군가는 알고 있었고, 누군가는 돈을 받고 모른 척했다. 그 사이에서 피해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경험을 증명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왜 어떤 고통은 당사자가 끝까지 증명해야 하는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흔히 씌워지는 '창녀' 프레임, 그리고 범죄자와 합의한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결백함' 같은 것들. 그러니까, 왜 돈을 받았냐, 굳게 필사적으로 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제 3자의 폭력들이 읽는 사람의 숨을 막히게 만든다.
이 회고록은 또한 ‘생존’이라는 말이 얼마나 복잡한 의미를 품고 있는지도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살아남은 사람에게 강하다고 말하지만, 그 말 속에는 그들이 견뎌야 했던 시간의 모양이 충분히 담기지 않는 것 같다. 피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는 수많은 실제적인 위협과 두려움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그녀가 끝내 말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책에서 가장 강하게 남는 부분이다. 한 사람의 증언이 또 다른 목소리를 불러내고, 그 목소리들이 모여 결국 거대한 사건의 진실을 드러내고 세상을 바꾸기 때문이다.
p.559 | 단 한 사람이 때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가능성이 있다면, 기어이 부딪쳐 봐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의 삶을 읽고 나면 이 문장의 무게가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종종 개인의 힘은 너무 미약하다며 한 사람의 발버둥을 쉽게 무시하곤 한다. 거대한 권력과 구조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단정해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질문을 다시 하고 있다. 과연 정말 그럴까.
솔직히 말하면 이 6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을 하루 만에 읽어 내려갔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읽힌 책은 아니었다. 몇 번이나 책을 덮어야 했고, 읽는 동안 세상이 견딜 수 없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이 감당해 온 시간을 생각하면, 내가 괴롭다는 이유로 책을 덮고 시선을 돌리는 일은 쉽게 할 수 없었다.
버지니아는 자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들리기를, 그 목소리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딸들이 더 안전한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 여성으로서 그 이야기를 끝까지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p.636 | 엡스타인은 사라졌지만, 그가 마음 놓고 괴물이 될 수 있었던 토양은 여전히 비옥하다. (···) 소녀의 가치를 오직 남성의 시선에 맞추어 재단하고, 남성들에게는 어린 소녀가 가장 탐스러운 존재이며, 엡스타인이 지껄였듯 '어릴수록 더 좋다'라고 부추기는 저열한 문화는 여전하다. 이런 뒤틀린 문화가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든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사회 분위기 탓에 포식자가 그 추악한 얼굴을 드러내도 많은 이들이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난 진짜 저런 ㅆ새끼들이랑 지구 같이 쓰고 싶지 않은데
++ 버지니아가 로비(책 내내 그녀의 가장 큰 지지자로 나온 그녀의 남편)의 가정폭력으로 인해 회고록 출간을 앞두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까지 진짜 비극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