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다가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은 책 속의 풍경과 책 밖의 풍경이 겹쳐질 때다. / 첫 문장
잘 모르는 분야는 책으로 배운다.
술도 마찬가지로, 주량에 비해 술 맛을 잘 모르는 터라 자꾸 술에 대한 이야기에 손이 간다. 『아무튼, 술』(김혼비, 제철소) 『술꾼들의 모국어』(권여선, 한겨레출판) 『낮술』(하라다 히카, 문학동네) 같은 것들에. 중요한 것은 책에서 술 쩐 냄새가 나면 안된다. 내가 원하는 건 적당히 마시며 맛과 분위기를 즐기는 거지, 크으 이야 이게 술맛이지 (술잔을 정수리에 탈탈 털며) 오늘 아주 그냥 죽어보자고, 하는 고주망태 알코올 중독 인간이 아니니까.
그런 점에서 『밤은 부드러워, 마셔』 역시 진작 보관함에 있었다. 특히 몇년전에 이청아 배우가 본인의 유튜브에서 이 책에 대해 조곤조곤 소개하며 바에서 술을 마시는 영상을 보고 아주 홀딱 반해버림. 다른 것보다 살짝살짝 보이는 책에 인덱스가 엄청 붙어있었는데, 대체 어떤 책이길래 하면서 보관함에 넣어뒀는데... 읽어야 할 책이 많아서 그렇게 다른 책의 홍수들에 떠밀리게 되었습니다...ㅎ.... 그러다 그 책의 후속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오른 기억들에 냉큼 신청해서 운 좋게 받아볼 수 있었다.
술은 책과 함께 마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골라 읽듯이 술도 술꽂이에 꽂아 두고 골라 먹는 사람으로서 드리는 말씀이다. / p. 63
보통 책은 차나 커피를 마시며 읽는 편이라 술은 생각도 안했는데 저번 달엔가 갔던 북카페에서 복숭아 맥주와 함께 시집을 읽었던 기억이 너무 좋아서 살짝 공감이 간다. 예전에 알쓸인잡에서 RM과 김영하가 술 마시면서 책 읽는 것에 대해 RM은 위스키를 마시면서 보고, 김영하는 그것이 이해가 안된다고 했는데 당시에는 나도 후자 쪽에 공감을 했으나 한번 술독 해보니까 몹시 이해가 감. 차가 좀 차분해지는 느낌이라면 술은 살짝 기분을 끌어올리면서 몰입하게 하는 느낌이라.
특히 이 책은 무슨 해리포터 마법주문 같은 긴 술의 이름을 수루룩 외면서 영화나 책 같은 문화적 요소를 그것과 같이 페어링한다. <중경삼림>에는 맥주를, 다자이 오사무를 생각하며 앵두주를. 그리고 정말 귀여운 월동 준비! 하리보 젤리를 코냑에 담가 두었다가 겨울 내내 한 마리씩 꺼내 먹으면 좋다는 이야기도. (이걸 읽으면서 당장에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에 코냑 어디서 살 수 있는지 검색까지 했다구...) 아, 이 에피소드 진짜 웃긴게 중간에 하리보가 뭔 크리스마스 요정같은거랑 같이 병나발 부는 삽화가 있는데 이렇게 속세스럽고 으른 같은 곰탱이 본적이 없어서 지하철에서 읽다가 웃어버렸다.
어쩐지 이 책을 읽은 감상으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만 하기보다는 계속 나랑 연결짓고 내 에피소드를 생각하게 되는데 이거야말로 에세이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다른 이의 글을 읽으면서 자꾸 나를 생각하게 만드는 글. 타인의 경험을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든 재현해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 술은 단지 매개일 뿐 그렇게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 체험을 하게 만들기에, 책장에 두고 있다가 어느 날 밤이나 바에 갈 때 빼내어 꼭 곁에 두고 술을 마시면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
+ 위에 말한 이청아 영상은 진짜 분위기 장난 아니니까 정말 추천합니다. 늦은 밤에 술 한 잔 하시면서! 특히 배우가 작가님이랑 친해지고 싶대요...증말 부러워...
++ 같은 술 에세이라도 『술꾼들의 모국어』는 반주 쪽이고, 이건 완전히 책과 영화, 분위기 쪽에 가깝다. 둘 다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말.
*도서만을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