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자기의 생을 승혜는 사랑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대로 영영 살아봐도 좋을 것 같았다. / p.57
다음 생에서 살아갈 모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생애전환 시행령'이 가능한 시기. 승혜는 맥반석이 되기를 희망했다.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막연히 좋은 것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돌고 돌아 승혜가 갖게 된 생은 타자기였다.
이 책은 허물어지는 몸과 그에 따라 흩어지는 기억 속에서도 잊고 싶지 않은 기억과 여전히 쓰이고 싶은 마음들을 이야기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복잡해지는 지점은 작품 외부의 독자나 작품 내의 제3자들은 인간의 삶을, 특히 하위 계층 노인들을 강제로 다른 물질로 전환시키는 제도가 비윤리적이라고 여기는 데에 있다. 인간이 비물질이 된다면 사회 전체가 부담해야하는 생명 유지 비용이 줄어드니까. 생산성이 떨어지는 자를 인간의 범주에서 밀어버리는 일이니까.
그런데 정작 당사자들은 늙을 권리와 생존의 의무를 빼앗겼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삶이 곧 노욕일 수 있으므로. 그런 생각을 하게끔 만든 그들의 곤한 삶이 어쩐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했고.
인간의 삶을 잇는 것 역시 자유이나 그를 포기하는 것 역시 개인의 선택이자 자유라고 생각한다. 존엄사에도 동의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사회가 암묵적으로 벼랑 끝에 내몬 일에서 기인한 거라면 그것은 정말 자유로운 선택이 맞나?
나의 몸이 사회적으로 가치가 떨어져 이제 쓸모가 없다 여겨질 때, 사회적 비용을 축내기만 하는 '것'으로 내몰릴 때 사회가 비인간적인 것이 되기를 강제하는 일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 답답해졌다. 마치 인간의 기준과 조건이 효용과 자본에 있는 것처럼. 그러나 나는 이 말에 적당히 반박할 언어를 아직 고르지 못했기 때문에. 작가가 끊임없이 사회에 던지는 예리한 돌덩이에 같이 맞으면서 나는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주제가 되는 기억보다는 사람다운 삶, 노인 빈곤과 복지의 문제에 더 방점이 맞춰져 덮는 순간까지도 무겁게 읽는 자의 발목을 잡는 날카로운 단편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