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너무너무 재밌다. 솔직히 3베르 1나르 작품은 『개미』 를 지금도 가장 1순위로 꼽는데, 키땅이 무섭게 치고 올라옴. 어느 정도냐면 일단 한번 펴면 이 책을 끝내기 전까지 중간에 잠깐 하차할 승강장이 없음. 1권도 그랬고 2권은 새벽에 잠깐 폈다가 밤을 세워서 다 읽었다. 보통 이런 식으로 시리즈가 있으면 1권이 매력적이고 2권은 힘이 빠지면서 엔딩이 나기 마련인데 이 책은 2권이 진짜 미쳤음.
보통 이 작가의 작품이 그래도 현재나 근미래에 발을 붙이고 있거나 혹은 아예 천국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했다면 『키메라의 땅』은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상당히 선명하게 풀어내고 있다. 실제로 키메라가 가능하냐 아니냐의 여부를 떠나, 만약에 정말 이런 일이 가능했을 때, 이 새로운 인류 키메라들이 선택하는 생존의 길이 얼마나 설득력 있었는지.
즉, 엄청나게 과학적이지는 않다. 철저하게 과학에 기반을 두었다기 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워서 큰 수고로움 없이 그냥 술술술 읽힌다는 것도 큰 장점. 과학보다는 철학에 무게를 두고 있는 책이라 접근성이 확실히 낮다.
1권은 3차 세계대전이 휩쓸고 지나가 황폐해진 지구에 두더지(디거,D), 돌고래(노틱,N), 박쥐(에어리얼,A)와 인간의 유전자를 섞은 혼종을 알리사가 인류의 미래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 내는 이야기.
2권은 이 혼종들이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는 이야기인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이유가 너무 납득이 된다. 심지어 신인류라고 만들어뒀더니 인간의 가장 좋지 않은 부분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 역시..🤦
추가로 읽는 내내 주인공인 알리사에게 굉장히 정이 안가서 혼났다. 일은 일대로 벌려놓고 스스로는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만들어 낸 혼종들을 진화된 사피엔스, 우리와 동등하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보다 아래로 보는 것이 여실해서. 물론 자신이 창조한 생물을 나란하게 보는게 오히려 더 어렵긴 하겠지만 이상하게 어느 순간부터 자기의 이상과 다르게 행동하는 혼종들을 외면하고 회피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 무슨 무책임한 회피형 매드 사이언티스트인가 했는데 생각해보면 알리사가 적극적으로 각자의 문명이 번성하는 흐름에 개입하지 않고 놓아두었을 때, 자연이 어느 방향으로 데려다 둘 것인가를 보여주어야 하므로 그렇겠구나 싶어서 납득이 갔다. 물론 그렇다고 호감이라는 건 아님.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오만하고 앞뒤가 다름. 정말 이입할 수 없는 화자였다.
이건 단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그린 SF인거 같은가? 인류가 협력과 공존이 아닌 배제와 단절의 길을 택했을 때 나란히 파멸하는 길에 들어선 일이 과연 상상 속의 일일까. 도합 600p 가량의 작은 세계를 들여다보며 우리는 인간이 자신들만을 위해 다른 생명들을 경시하거나, 자연을 골라 취사선택하여 진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교만한 착각들을 제3자의 눈으로 마주하게 된다.
우월종의 지위에서 사피엔스들이 무엇을 해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를 인류 전체의 위기를 목전에 둔 지금 읽지 않으면 대체 언제 읽겠단 말인가.
+ 키메라 관련 이야기에서 혼종들에게 공감을 할 수 있는 포인트가 '인간성'에 있다는 게 재밌음.
예를 들면 『모로 박사의 섬』에서의 혼종들에게는 전혀 공감도 안가고 그냥 끔찍했는데, 『모로 박사의 딸』(황금가지, 2025)나 『키메라의 땅』의 혼종들은 말이 일단 통하고, 그들에게서 우리와 비슷한 인간성이 보인다는 이유로 바로 마음에 품어버리게 됨. 작가의 서술 차이도 있겠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타종보다는 동종의 냄새가 나는 생명들에게 마음을 더 주게 되는 건 당연한게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