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책 표지를 보고 말했다.
제목이 농담인데 왜 표지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작가 사진은 이렇게 진지한 표정이냐고. 안 어울린다고.
이런 말이 안되는 상황을 이해하는 과정이 어른이 되는 것 아닐까?
하나뿐이기에 진지하게 임해야 할 삶이지만 불가해한 일이 너무도 많기에 농담처럼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농담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에 진지한 삶의 통찰을 담은 이 책이 표지 하나로 다 표현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단지 그녀의 단순함이 내가 그때까지 몰랐던 새로운것이어서 내가 루치에에게 끌렸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그녀는 순진하고 배움이 모자랐으나 나를 이해하는 데 전혀문제가 없었다. 그 이해는 많은 경험이나 지식에서 나오는것도 아니었고, 어떤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조언을 해 줄 수있는 능력에 기인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다만 그녀가 내 말을 귀기울여 들으며 그대로 다 받아들여 주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P-1
나는 스물두 살이었고, 내게 무언가 여성적이거나 어린아이 같은 분위기를 풍기게 할 만한 것들은 무엇이든 피할 때였다. 거리에서 꽃을 들고 다니는 것도 창피스러웠고 꽃을사는 것도 싫었으며 꽃을 받는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거북해하며 루치에에게 꽃은 남자들이 여자에게 주는 것이지 여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거의 울음을터뜨릴 것처럼 되어 버린 그녀를 보고는 얼른 꽃이 참 예쁘다고 하면서 받아들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날부터 우리가 만날 때마다 꽃다발이 나를 기다렸고 결국 나도 익숙해졌다. 그 선물이 하도자연스러워 어떻게 할 수도 없었고 또 루치에가 그렇게 나에게 선물을 주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을 잘 못해서 괴로워하다가 꽃을통해서 어떤 말의 형태를 발견했던 것이었다. 그 말은 옛 꽃말들에 담긴 수많은 상징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더 오래되고, 더 알 수 없고, 더 본능적인 언어 이전의 어떤 것을 뜻했다. 언제나 말하기보다 가만히 있곤 하던 루치에는 언어가 존재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세세한 몸짓들로 이
"야기를 하던 시대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손가락으로 서로•나무를 가리키고, 소리내어 웃고, 서로 몸에 손을 가져다 대고, 그렇게 하던...- P-1
오스트라바에서의 생활도 벌써 일 년이 지났고, 처음에는견디기 힘들던 군복무도 이제는 내게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 되어 있었다. 그 모든 고달픈 일들 가운데서도 나는 어쨌든 살아 낼 수 있었고, 친구도 두세 명 사귀었으며, 행복했다. 그 여름은 내게 정말 아름다운 여름이었다.(검댕으로 가득한 나무들도 탄광의 어두움을 겨우 씻어 낸 내 눈에는 그지없이 푸르게 보였다.) 그러나 불행의 씨앗은 더할 수 없는 행복의 한가운데 숨어 있는 법이다. 그해 가을의 슬픈 일들은 이 짙푸른 여름에 잉태되어 있었다.- P-1
그렇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이. 우리 삶의 모든 중대한 순간들은단 한 번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척해서도 안 된다. 현대인은 속임수를 쓴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중대한 순간들을 모두 교묘히 피해 가려 하고,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은 채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죽음까지 가려 한다.- P-1
우리의 삶과 관련된 말은 아무리 사소한 문장이어도 결국 우리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보여주고 말았다. 우리의 전망, 우리의 미래가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음을. 우리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떠밀려가 버렸음을.
그래서 나는 아주 소소한 상투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더 나빴다. 일부러 대화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 곧 그대로 다 드러나 버렸고 그래서 견디기 힘들어져 버렸다.- P-1
거기에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푸치크가그저 자기 만족으로 썩어 빠진 인간이었을 뿐이라고?
•루드비크는 질주하는 말 같았다. 아니, 그로 하여금 그런글을 쓰게 했던 건 전적으로 그런 자만 때문만은 아니야. 약했던 거지.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타인들의 찬동도 없이,
오로지 자기 자신과 대면한 채 홀로 고립되어 용감함을 고수하는 일은 엄청난 자긍심과 힘을 요하거든. 푸치크는 대중의도움이 필요했던 거야. 감방의 고독 속에서 적어도 가상의대중이라도 만들어 내야 했지. 그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필요했던 거야! 박수 소리로 자신의 힘을 추슬러야 했지! 다른 게 없으니 상상의 박수라도 말이야. 감방을 하나의 무대로 바꿔 놓고 자신의 운명을 전시하고 내보임으로써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야 했던 거야.
나는 루드비크가 몹시 상심했으리라는 예상은 했다. 독기를 품고 있으리라는 예상도 했다. 하지만 이런 광적인 분노나 독설이 날아온 것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 가엾은 푸치크가 그에게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는 말인가? 나는 한 인간의가치는 그가 얼마나 신의를 지키는가에 있다고 본다. 루드비크가 부당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그렇- P-1
기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한 것이다. 그의 견해가 바뀐 동기가 너무도 빤히 들여다 보였기 때문이다. 모욕을 받았다는이유 하나만으로 삶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완전히 뒤집어버릴 수 있는 것인가?
이런 말을 나는 루드비크에게 대놓고 모두 이야기했다.
그러자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루드비크는 내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들끓던 분노가 갑자기 그에게서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그는 묘한 눈길로 나를 물끄러미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조용하게, 언짢아하지 말라고 말했다. 자기가 잘못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너무도이상하게, 너무도 차갑게 그 말을 했기 때문에 전혀 진심이아니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빈말로 우리의 대화가 끝나기를 원치 않았다. 기분이 씁쓸하기는 했지만 내 마음은 처음에 다짐했던 그대로였다. 루드비크에게 내 마음을 다 이야기하고 우리의 우정을 회복하고 싶었다. 아무리 서로 심하게 부딪쳤어도 나는 예전에 그토록밝고 환했던 우리 둘의 작은 공간, 이제 우리가 다시 함께 살수 있을 공동의 작은 공간이 어딘가에, 긴 논쟁의 끝에, 마련되어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대화를 계속해 보려는 내 노력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루드비크는 이번에도 또 과장해서 심하게 말하는 자기 버릇이 도졌노라고 수도 없이 변명을했다. 그리고 자기가 한 말을 모두 잊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P-1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