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리뷰] 여름과 루비
쏠라시도 2025/11/22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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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과 루비
- 박연준
- 15,300원 (10%↓
850) - 2022-07-15
: 4,749
작가의 삶에서 찢어진 페이지를 담아낸 소설이라는 말에 읽은 소설.
그 거대한 용기가 부럽다.
보드랍고 섬세한 언어들로 조합된 문장들로 책을 읽는 내내 마치 실크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유년이 시절이라는 것. 유년은 ‘시절‘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 멈추거나 끝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컸다고 착각하는 틈을 비집고 돌아와 현재를 헤집어놓는다.
사랑에, 이별에, 지속되는 모든 생활에, 지리멸렬과 환멸로 치환되는 그 모든 숨에 유년이 박혀 있다. 붉음과 빛남을 흉내낸 인조보석처럼. 박혀 있다. 어른의 행동? 그건 유년의 그림자, 유년의 오장육부에 지나지 않는다.- P-1
할머니는 나를 두고 일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쓰다듬고 쓰다듬었다. 어루만져서 좋아지는 게 세상에 있다는 듯이. 그 있음을 보듬는 눈빛과 손길로 나를만졌다. 나는 할머니 손에서 다시 빚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고요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의 손길에서만 존재의 당위를 얻었다. 그럴 땐 할머니가나를 낳았어야 했다고, 내 엄마여야 했다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것은 쉽게 사라진다. 첫눈, 미소, 할머니, 인생의 봄. 왔다가 금세 가는 것.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이런생각을 내가 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생각하고,
생각을 생각한다. 생각은 사건 후에 온다. 시간이 지난후, 그때를 기억한 마음에 결정처럼 내려앉는 것. 다마네기처럼 내가 미끄러워서, 내 존재가 미끄러워 사랑하는사람을 붙잡아두지 못하는 걸까 고민한 적이 있다. 그렇다. 어릴 때 나는 대체로 미끄럽게 존재했다. 미끄러워서 다들 나를 타고 훌훌 내려갔다.- P-1
나는 ‘난삽하다‘의 정확한 의미도 모르면서 루비에게 물었다. 그건 며칠 전 담임이 우리 반에서 가장 공부를못하고 가장 지저분한 옷을 입고 가장 슬픈 표정을 짓는남자애를 추궁하며 사용한 말이었다. 그 말은 누가 내머릿속에 은하수를 부은 것처럼 신선하게 들렸다. 난삽하다니? 난과 삽이란 두 음절을 사용해 가엾은 그애를,
그리고 반 아이들의 동공을 흔들리게 하다니. 아이들은선생님의 말 한마디로 세계에서 규정당한다. 진짜 이름을 받는다. 하늘을 날거나 지구 밖으로 꺼질 수 있고, 직업을 갖게 되거나 꿈을 잃을 수 있다. 불공평하지만 그렇다. 나는 열한 살 때 선생님이 "다른 건 고만고만한데 글쓰기는 빠르고 정확하고 기막히게 잘하는구나"라고말하는 바람에 직업이 결정되었다. 불공평한 세계에 거처하던 시기였으니까.
"난하다는 게 뭐야?"
"정돈할 수 없다는 거야."-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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