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가 되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좋았던 이야기와 구절들이 잊혀질 쯤 다시 또 읽고 새기고 싶다.
세상에서 첫번째로 신기한 일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일. 이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길을 걸은 일. 사물이 두 개만 있어도 그 사이로 길이 생겨난다. 그러니 지금까지 내가 걸은길들은 모두 나무와 나무 사이라든가, 집과 집 사이, 혹은 사람과사람 사이이거나 능과 능 사이였다.
사이로 길이 난다.
그렇게 바라보는 것들 중 하나가 호수 너머로 보이는 저녁 빛이다.
호수 옆에서 산 지도 벌써 십 년이 넘는다. 저녁을 먹고 호수까지 걸어가면 해는 이미 저문 뒤다. 어스름 속의 호수에서는 서쪽의 빛까지가 부속 시설이다. 여름의 빛은 끈덕지다. 쉽게 물러서는 법이 없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이 잔영은 하지부터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날마다 펼쳐진다.
나무들 사이에 서서 그들과 함께 어두워지며 올려다보는 저녁의 빛은 세상에 지친 마음을 교정해준다. 모든 것이 다 끝난 뒤에도 우리에게 남은 게 있음을 지켜보는 일. 이것이 저녁 산책의 기쁨이다. 애당초 기쁘게 살고 싶다. 는 아니었다. 아무리 번거롭고힘들더라도, 또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오해를 한다 해도기쁘게 죽을 수 있도록 살고 싶다, 는 마음이 거기 있었다.
저녁이면 그런 마음을 생각하며 호수 둘레의 길을 오래오래 걷는다.
태풍은 잠시 잊어버리고 카페에 앉아 책을 읽었다. 「가만히,걷는다』라는 책이었다. 프랑스 작가들의 산문이 모여 있었다.
‘파리의 오렌지는 나무 밑에 떨어진 것을 주워온 열매처럼 슬퍼보인다‘고 알퐁스도데는 썼고, 마르셀 프루스트는 나이가 든 뒤에도 산사나무꽃을 보면 그 꽃을 처음으로 봤던 나이와 심장을 되찾는다고 썼다.
그리고 프랑수아즈 사강은 열여섯 살 때 혼자 남은 파리에서 만난 부랑자의 말을 옮겨놓았다.
원래는 그에게도 아내와 아이들과 좋은 차와 재산이 있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자기 인생이 흘러가고 있는데, 정작 자신의 눈에는그 흐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렇게 살다가는톱니바퀴 같은 것에 물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죽어가리라는 것도.
그는 종일 자신이 하는 일이 ‘사는 법‘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건 시간이 흐르고 날이 저무는 걸 보는 일, 자기 손목에서 피가팔딱팔딱 뛰는 소리를 듣는 일, 산책하고 강을 보고 하늘을 볼 뿐.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 일이다.
내게는 무엇이 사는 법‘일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작되고 식당과 술집이 저녁 아홉시면 모두 문을 닫아야만 했을 때였다. 어떤 풍경일까 궁금해 나가본 적이 있다. 밤새도록 가게마다 손님들로 가득했던 광경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 같았다. 불 꺼진 번화가는 이미 찾아온 미래처럼 내게 다가왔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나는 어떤 삶을 원하게 됐다. 좋아하는 일을 더 자주, 더 많이 하는 삶, 돋보기로 모은 햇빛처럼 초점이 또렷한 삶이다. 누가 뭐라든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에몰두하고 싶다. 뒤처지는 것 같겠지만 좋아하는 일은 얼마든지,
그러니까 하루종일 할 수 있으니까 사실은 제일 앞서가는 일이다.
내게는 독서와 글쓰기가 바로 그런 일. 나의 ‘사는 법‘이다.
자잘한 파도에도, 큰 파도에도 마음은 부서진다. 조금씩, 혹은 한꺼번에 많이 부서지는 마음을들여다보는 건 무서운 일이다.
물결이 물러나면 밀려온 경계가 서서히 지워지고 그 위로 새로운 물결이 밀려왔다. 매번 다른 파도였고, 새로운 모양의 경계가만들어졌다. 매일 아침 생겼다가 저녁이면 부서지는 어떤 마음들처럼. 그때의 나에게, 혹은 소설 속 할머니에게 그래도 괜찮다고말해주고 싶다. 그게 완벽한 삶이라고. 완벽한 인생이란 완벽하지 못한 것들, 못난 것들, 부서진 것들까지도 모두 아우르는 삶이라고.
어떤 마음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알 순 없지만 생겨난 마음이 부서질 때 삶이 온전해진다는 것은 알 것 같았다.
강릉 같은 곳에서 살아 매일 파도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파도를 볼 수 없는 곳에서 사는 나는 바다 삼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에도 파도는 있다. 그것은 날마다 달라지는 날씨다. 맑은 날이 하루라면 궂은 날도 하루다. 바람이 세차게 불다가도 날이 바뀌면 고요해진다.
하루하루가 다른 날씨들이다. 나는 그 날씨들을 살펴보고 생각하고 공부한다. 모든 날씨에는 끝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다음이 있다는 것. 그러니 끝날 때까지는 그날의 날씨를 즐겨야만 한다는 것.
그게 내 날씨 공부의 전부다. 비가 내리면 당분간은 비가 내리는 대로, 햇살이 선명하면 당분간은 햇살이 선명한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
그러자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 일에 나는 모르는 어떤 의미가있는 게 아닐까? 그걸 모르는 한에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게 아닐까? 나는 이백 년 뒤를 상상했다. 이백 년쯤 지나면 나도이 일을 이해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이해는 나중의 나에게 부탁하고, 일단 가보자. 또 어떤 일이 펼쳐질지 한번 지켜보자.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지금의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뿐일 테니까.
그렇게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미래를 향해 문을 열었다.
나보코프는 ‘우리는 책을 읽을 수 없다. 다시 읽을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이 좋을지 나쁜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시간이 지난 뒤에다시 알 수 있을 뿐이다. 다시 아는 것, 그게 이해다. 스물네 살의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알게 됐다. 인생의 이야기는 먼저사람의 행동과 나중사람의 이해로 완성된다. 서로를 그려가는 두 개의 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