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일기에는 ‘나‘에 대한 말들로 가득했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일까를 알기 위해 애썼던 십대의 내가 거기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라는 존재가저지른 일, 풍기는 냄새, 보이는 모습은 타인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천 개의 강에 비치는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었고,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믿었던 많은 것들은 말 그대로 믿음에 불과했다.
지금 이 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것과 스스로 결정한 것들이뒤섞여 만들어진 유일무이한 칵테일이며 내가 바로 이 인생칵테일의 제조자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삶을 잘 완성할책임이 있다.
평론가 앤드루 H. 밀러는 우연한 생』에서 인류학자클리퍼드 기어츠의 말을 인용한다. "누구나 수천 개의 삶을살 수 있는 조건들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결국에는 그중단 한 개의 삶만 살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때 만약그 길로 갔더라면/가지 않았더라면‘으로 시작하는 상상을통해 자주 후회에 도달한다. 진화심리학 쪽에서는 인간이이런 후회를 자꾸 하도록 진화한 이유가 과거의 실수를
반성함으로써 미래에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였을것이고 그런 개체가 더 잘 살아남았을 거라고 추측한다.
이런 실용적인 설명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살아보지 않은 삶‘을 상상하는 데는 더 근원적인 동기가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지 않은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미래에 나쁜결과와 마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현재살고 있는 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다. 의미 있는 삶에대한 갈망은 그 어떤 전략적 고려보다 우선하고, 살지 않은삶에 대한 고찰은 그런 의미를 만들어내거나 찾는 매우효과적인 방법이다."
삶을 사유하다보면 문득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토록 소중한것의 시작 부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작은 모르는데어느새 내가 거기 들어가 있었고, 어느새 살아가고 있고,
어느새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소설이나 영화는 시작 부분에공을 많이 들인다. 첫인상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가알고 있다. 그러나 내 삶이라는 이야기에는 첫인상이랄게없다. 숙취에 절어 깬 아침 같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것 같은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 기분. 내 삶의 서두는기억이 나지 않는 반면, 나와 무관한 다른 삶들은 또렷하고, 그것들은 대부분 소설이나 영화에 담겨 있는 것들이다.
받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은 그저지구상의 인간을 위한 편의적 개념일 뿐이라는 설명이그렇다. 또한 시간은 우리가 우주의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다 다르고, 어쩌면 거꾸로 흐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같은것. 내가 다른 삶을 상상하거나 거기에 매혹되는 이유는어쩌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불가역한 시간이라는 개념에익숙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여기에서 벗어난다면좀더 편안하게 미지의 미래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미래처럼 보이는 과거일 테니까. 이미 일어난 일인데내가 아직 모를 뿐이니까. 크리스마스 날 아침까지 풀지못하는 선물처럼, 놀라움을 위해 알려주지 않는 것뿐일테니까. 그리고 어떤 세계에서는, 그것이 다른 차원이든
‘사건의 지평선 너머든, 아버지와 엄마는 죽지 않았고, 나는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내가 그들의 부모였을 수도있다. 그 밖에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내 삶이 어쩌면가능했을지도 모를 무한한 삶들 중 하나일 뿐이라면, 이 삶의 값은 0이며 (1/무한=0) 아무 무게도 지니지 않을 것이니, 존재의이 한없는 가벼움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더는 단 한 번의삶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 태어나지 않았을 때 나는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을 몰랐기에 전혀 애통하지 않았다. 죽음 이후에도 내가 죽었음을 모를 것이고, 저 우주의 다른 시공간 어디엔가는 내가 존재했는지도 모르는 내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