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에서에 이어 달과 6펜스
서머싯 몸이 그려낸 스트릭랜드가 폴 고갱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 스트릭랜드가 가졌던 순수한 예술적 열망이 그의 삶을 고결하게 만들었지만, 폴 고갱의 삶은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6펜스의 세계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소설과 현실의 괴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를 몰랐다.
난 나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하네. 내가 보기엔, 사랑에 자존심이 개입하면 그건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야.
나는 그가 말하려는 것을 짐작해 볼 도리밖에 없었다. 스트릭랜드는 그때까지 자신을 얽매어왔던 굴레를 과감히 깨뜨려버렸던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뭐랄까, 전혀 생각지 못했던 힘으로 넘치는 새로운 혼을 발견했던 것이다. 강렬하고 특이한 개성을 대담하고 단순하게 묘사한 것만은 아니었다. 살결은 열정에가득한 어떤 관능, 불가해한 어떤 것을 품고 있는 관능으로 채색되어 있었는데, 그렇다고 채색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중량감, 그러니까 육체의 무게를 뚜렷하게 느끼게 해주는 그런중량감에 그치는 것만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어떤 영적인 것이혼을 어지럽히는 전혀 새로운 어떤 영성(性)이 깃들어 있어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상상을 이끌어 가면서, 영원한 별들만이 빛나는 어둡고 텅 빈 우주를 벌거벗은 영혼이 두려움에 떨면서 새로운 신비를 찾아 모험의 여정을 나선 그런 우주를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이 설명이 수사적으로 여겨진다면 그건 스트로브가 수사적이었기 때문이다(사람이 감정에 빠지면 자기도 모르게 소설을 쓰듯이 이야기한다지 않는가). 스트로브는 여태까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어떤 느낌을 표현하려고 애썼지만 그것을 보통의 어휘로 표현해 낼 줄 몰랐다. 그는 마치 언어로는 기술할 수 없는어떤 것을 말로 설명해 보려고 애쓰는 신비주의자 같았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표현했다. 사람들은아름다움이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사용한다. 말에 대한 감각이없어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함으로써 그 말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별것 아닌 것들을 기술하면서 온갖 것에 그 말을 갖다 쓰기때문에 그 이름에 값하는 진정한 대상은 위엄을 상실하고 만다.
그저 아무것이나 아름답다고 말한다. 옷도 아름답고, 강아지도아름답고, 설교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아름다움자체를 만나게 되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생각을 돼먹지 않은 과장된 수사로 장식하려는 버릇이 있어그 때문에 감수성이 무뎌지고 만다. 신령한 힘을 어쩌다 한번체험하고선 그것을 늘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속이는 돌팔이 의사처럼, 사람들은 가진 것을 남용함으로써 힘을 잃고 마는 것이다. 그래도 스트로브는 구제할 길 없는 어릿광대이면서도, 아름다움에 대해서만은 자신의 영혼처럼 성실하고 정직한 사랑과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신자들이 경외하는 신과 같아서 그것을 볼 때에는 외경심을 느꼈다.
스트릭랜드가 왜 갑자기 그림을 보여주겠다고 했는지 알 수없었다. 잘됐다 싶었다. 작품은 사람을 드러내는 법이다. 사람이란 사교적인 교제를 통해서는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외양만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람을 진짜로 알기 위해서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소한 행동이라든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스치는 순간적인 표정을 통해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 때로는 가면을너무 철저히 쓰고 다니다가 정말 그 가면과 같은 인격이 되어버리는 일도 있다. 하지만 책이나 그림은 진짜 모습을 꼼짝없이드러내고 만다. 겉만 그럴싸한 것은 곧 속이 텅 비어 있음을 나타낼 뿐이다. 옷가지를 쇳조각처럼 칠한다 해도 쇳조각처럼 보일 리는 없다. 아무리 특이하게 꾸민다 해도 평범한 정신을 감출 수는 없다. 그냥 우연히 만들어진 작품에서도 날카로운 관찰자는 영혼의 깊은 비밀을 읽어내고 만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홀로이다. 각자가 일종의 구리 탑에 갇혀 신호로써만 다른 이들과 교신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신호들이 공통된의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뜻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전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마치 이국 땅에 사는사람들처럼 그 나라 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온갖 아름답고 심오한 생각을 말하고 싶어도 기초 회화책의 진부한 문장으로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람들과 똑같다.
정말 아브라함이 인생을 망쳐놓고 말았을까? 자기가 바라는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그것은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
섬 생활에 신나는 일은 없어요. 바깥 세상
하고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생각해 보십시오. 타히티까지오는데만도 나흘이 걸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린 섬 생활이 행복해요. 어떤 일을 시도해서 그걸 성취하는 사람은 많지 않죠.
우리 생활은 소박하고 순진합니다. 야심에 물들 일도 없고, 자부심을 가진다고 해봐야 그건 우리 손으로 해낸 일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그런 자부심뿐이고요. 악의를 가질 일도 없고, 부러움으로 속상해 할 일도 없어요. 아, 정말이지, 선생, 사람들이신성한 노동이다 뭐다 하는데 그건 헛말이에요. 하지만 내게는그게 아주 절실한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작품해설 중
가정을 팽개쳐버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일을 작가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제스처를 씀으로써 오히려 내적충동의 필연성과 신비감을 강렬하게 만들고 있다. 세속의 윤리와가치를 일거에 넘어서버리는 그 비약을 비약 자체로 남겨둠으로써오히려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나레이터를 처음부터 주인공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만들었던 것도 같은 효과를 겨냥한 수법이다. 이야기의 중반 이후는 나레이터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엮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수법은 흔하지만 여기에서는 신비감을 고취하는 데 특별히 효과적으로 이바지하고 있다. 독자는 주인공이 산 삶의 중요한 부분을 직접보거나 들을 수 없어 서로 다른 관점을 통해 그의 삶의 성격을 짐작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진실이나 자유의 정체는 결국 그런방식으로밖에 접근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