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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ll1223님의 서재
  • 쾌락독서
  • 문유석
  • 14,400원 (10%800)
  • 2018-12-12
  • : 7,911
책보다 삶은 언제나 크지만, 책을 읽어온 사람들을 신뢰한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좋아하는 작가라면 더더욱 신뢰한다. 이 두 가지에 해당하는 작가의 책을 읽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 무지는공포와 혐오를 낳는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모든 언어가 소음으로만 들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위협으로 느껴진다. 소음과 위협, 공포에 둘러싸여서 사는 것은 불행하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면 의외로 타협하고 수용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나에게도평화를 준다. 동시에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준다. 미디어의 발달로 그 어느 시대보다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쏟아져나오는 지금은 더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귀를 닫아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당장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처지의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에나 빼고는 다 정신 나간 사람들만 있는 것 같다.
정치, 젠더, 환경, 교육・・・・・・ 거의 모든 이슈마다 양쪽 극단에서 가장 큰 소리들이 쏟아져나온다. 목소리가 크고 공격적인 이들이다. 중간에 있는 이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왜저사람들은 저렇게 공격적이고, 유연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고,
시끄럽지? 하지만 그 소음 속에는 귀기울여 들어야 할 진짜 신호들이 있다. 그건 대부분 힘들어 죽겠어 아파 억울해 라는 비명이다.
성폭력을 겪은 이들이 어떻게 온건하고 예의바르게 성차별과 혐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알바로 하루하루 살아기는 젊은이가 어떻게 최저임금 인상이 거시경제에 미칠 영향까지 걱정할 수 있을까.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노인이 어떻게안보에 대해 지나칠 만큼 예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줄다리기는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아니라 중간에맨 손수건이 약간 움직이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된다. 중간에있는 이들이 제자리에서 튼튼하게 버텨주지 않고 시늉만 하고 있으면 줄은 한쪽으로 확 끌려가고 만다. 중간자들은 성실한 독자여야 한다. 들어야 할 진짜 목소리를 듣고, 작은 한걸
음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내디뎌야 한다.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이를 악물고 외쳐대는 욕설 때문에 이들을 비웃어서도 안 된다. 결국 가장 먼저 넘어져 뒹굴고 흙투성이가 될것은 양끝에서 몸을 던지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임을.
가까스로 비명이 멈췄고 물결도 잔잔해졌다. 갑판 바로 열까지 다가온 혹등고래는 눈을 들어 우리를 바라봤다. 고래의눈은 무표정한 물고기의 눈과 달랐다. 새끼를 위해 지구 반바퀴를 헤엄쳐온 포유류의 눈은 따스했다. 물론 이 시선에 뭔가의미를 부여하고 위로받고자 하는 것 또한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그런 어리석음이라도 있기에 견뎌낼수 있는지 모른다. 쉽게 보답이 주어지지 않는 삶을.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책 이동진 독서법』을 읽다가 깊이 공감하는 구절을 만났다. 삶을 이루는것 중 상당수는 사실 습관이고,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것이라는 구절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이구아수폭포를 보고 싶다, 남극에 가보고 싶다 등 크고 강렬한 비일상적 경험을 소원하지만 이것은 일회적인 쾌락에 불과하고,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 자체가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사람이라고." 마치 동화 『파랑새』를 연상시키는 일견 익숙하고 평범해 보이는 말이지만, 실은 굉장히 과학적인 말이기도하다. 인간의 행복감에 관한 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공통적으로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말한다.
서울대 인문대학원에서 야간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중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관한 시간. 교수님이 처음에는정해진 자료에 따라 강의하시다가 점점 관련 연구 이야기를신나게 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도에 간 구법승이 혜초 외에도많았는데 그들이 얼마나 살아서 돌아왔는지가 궁금해졌단다.
그래서 온갖 고문헌을 추적하여 구법승들의 생환율을 조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야기하는 교수님을 보며 든 두가지 생각. ‘아, 아름답다‘ 그리고, ‘아, 그런데 쓸데없다. 깨달음의순간이었다. 인문학의 아름다움은 이 무용함에 있는 것이아닐까. 꼭 어디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궁금하니까 그걸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칠 수도 있는 거다. 물론 구법승 생환율을 토대로 당시의 풍토, 지리, 정세에 관한 연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꼭 그런 용도로 연구를 시작하신 것같진 않았기에 든 생각이다. 실용성의 강박 없이 순수한 지적호기심만으로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학문의 기본 아닐까. 그 결과물이 활용되는 것은 우연한 부산물일 뿐이고, 수학자들은 그 자체로는 어디에 쓸 일 없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350여 년간 몰두했다. 그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많은 수학 이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현재 쓸모 있어 보이는 몇 가지에만 올인하는 강박증이야말로 진정 쓸데없는 짓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것들이필요하고 미래에 무엇이 어떻게 쓸모 있을지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게 진짜로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당할 도리가 없다.
물론, 슬프게도 지금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모든 것이 언젠가 쓸모 있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실용성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로또 긁는 소리다. 하지만 최소한 그 일을 하는 동안 즐겁고 행복했다면, 이 불확실한 삶에서 한 가지 쓸모 있는 일을 이미 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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