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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ll1223님의 서재
  • 숨은 신을 찾아서
  • 강유원
  • 12,600원 (10%700)
  • 2016-12-05
  • : 2,230

과학적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이 대체로 옳다.
고 여기기는 하여도 과학이 인생의 모든 일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며, 그저 때를 기다리다 보면 이루어지는 일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정신일도하사불성‘ 같은 허무맹랑한 정신주의에 매몰되어 있지도 않으며, 매사가 항상 잘되는 것만은 아니어서 달도 차면 기울듯이 때가 되면 집착을 버리고 물러서야 한다고도생각한다. 내가 지키려고 하는 원칙들은 엉켜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맹신으로 보일 만큼 하나의 종교적 원칙에 맞추어 정돈할 생각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자연과학이라는 확고부동한 원리에 따라 이 모든 것을 재단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되어가는 대로 크게 세상사와사람들과 어긋나지 않는 한 두어두되, 뭔가 문제겠다 싶으면 이리저리 재어보고 이것저것 따져보고 지킬 건지키고 고칠 건 고치려 한다. 아주 오랫동안 변함없이 지켜온 것은 사실상 없다. 무엇이 나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것인지를 규정할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뚜렷하게 내놓을 수 없고,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그저 ‘나는 존재하는 생물‘이라는 것뿐이다.
파스칼은 말한다.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우리의 모든 탐구는 ‘숨은 신‘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것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가는 삶의 과정에 있다. 더러는 바다를 건너가기도 하면서 더러는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면서, 때로는 오뒷세우스처럼 때로는 에이해브처럼,
데카르트는 여전히 신을 찾아 갈등하는 사람이고, 칸트는 싸늘하게 신을 버린 사람이다. 칸트 이후의 시대는 신 없이 살 수 있다. 그저 사는 것이다. 이것이잘 사는 것인지,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 보람 있게 사는것인지, 덜 떨어진 삶을 사는 것인지, 이런 것들을 물어보지 않고 남들과 부딪히지 않고 그렇게 그렇게 사는 것이다. ‘좋음‘에 대한 물음 없이 사는 것이다. 좋음에 대한답은 각자의 내면에서 각자가 내려가면서 사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궤적이 곧바로 자신의 삶의 정당화 근거가되는 삶이다. 공동체가 합의한 규약과 절차를 어기지 않는 한.
외부의 경험이 나에게 주어지고, 내가, 나의 신경세포가 그것에 의해 변화하고, 다시 외부로 자신을 투사하고, 그러한 오고감이 수없이 되풀이된 다음에야 ‘의식‘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의식은 오로지 나의 것인가. ‘오로지 나‘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알 수 없다. 내가 의식이라부르는 것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외부의 자극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우연히 주어진다. 분명히 외부로부터 나에게들어와서 나의 의식이라는 것을 만들어냈으니 뭔가 있기는 하다. 어디까지인지 경계를 확정할 수 없으니 오로지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의 범위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남의 것이라 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서,
내가 나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유일한 것이다. 지금까지 내 삶에서 주고받은 모든 작용의 총합이다. 유일한 총합이다. 그 총합들 각각은 다르다. 그것을 편견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누구나 그러한 것을 자기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내가 얻게 되는 최소한의 통찰은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자기 안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자신을단단하게 만들어 강한 사람이 되려 하지는 않는다. 안으로 들어가서 신을 찾는다. 아직은 신이 필요하다. 살육의전장이 그를 신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도 관념론이다. 관념론은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이 진리라는 신념이다. 이 진리는 우리 인간이 아닌 저기에 있다. 인간이 어찌하든 저기에, 객관으로서 있다. 객관으로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플라톤이말하는 진리인, 눈에 보이지 않는 형상은 저기에 있다. 인간은 그것을 바라보아야 하고, 노력해서 그것을 알아야만 하고, 그것을 온전히 가져야만 하고, 온전히 가지지 못하면 그것을 모방이라도 해야 하고, 그것이 진리라는 확신이 없다면 언젠가는 수정할 것을 각오하고서 ‘진리 닮은 것‘이라도 가져야만 한다. 근대 이후의 삶을 지배하려 해온 자연과학의 법칙들도 저기에 있는 보이지 않는것들을 잠정적 진리로 간주한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그
렇다고 믿든 아니든 진리로서 있다. 그것은 우리 동네에서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서 전 우주에서 작동하는 보편적인 것이다. 보편적이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은 그것이 진리임을 전면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궁극의 것은 논증(apodeixis)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틀림없이옳은 진리라고 말하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든 틀린 것으로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품고 있다. 그 걱정을 무시하지 않고 받아들여야만 과학자이고, 이들 과학자들은공동체를 형성하여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견제하기도한다. 우리는 보편적 진리를 탐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틀릴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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