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내 시작품에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네. 인생이란 쓰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있는 것이니까.
내 목표는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네. 삶의 순간 순간에서 그 순간의 정서를 음미하면서 말야. 난 내 글쓰기를 말이지, 존재로부터 기쁨을 흡수한다기보다 거기에 기쁨을 부여하는 아름다운 행위라고 보네. 후세의 문제는 말일세후세따윈 상관없네」필립은 미소지었다. 이 삶의 예술가가 써내는 것은 형편없는 화가의 졸작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크론쇼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더니 잔을 채웠다.
그는 웨이터에게 담배 한 갑을 가져오라 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하니 자넨 재미있을 거네만,알다시피 난 가난해서 조그만 다락에서 살고 있어. 미용사들하고 카페의•보이들이랑 짜고 나를 등쳐먹는 상스러운 여자하고 말이지. 영국 독자를 위해 쓰레기 같은 책을 번역하기도 하고 욕먹을 가치•도 없는 형편없는 그림을 보고 논평을 쓰기도 하지. 하지만 자네, 인생의 의미가 도대체 뭔지 말할 수 있겠나?」「글쎄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죠「아닐세. 자네 스스로 답을 발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그런데 자넨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건 불가능해. 자네도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거야. 세상을살 만한 장소로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선 필요한 일은 인간의 불가피한 이기성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자넨 타인에게이기적이 아니기를 요구하는데 그건 자네의 욕망을 위해 타인더러 자신의 욕망을 희생하라고 하는 모순된 주장이야. 타인이왜 그래야 하나. 모든 개인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자신을 위한다는 사실을 자네가 받아들여야 자넨 다른 사람들에게 덜 요구할수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덜 실망할 거고, 다른 사람들을 더자비롭게 바라볼 수 있어. 사람은 인생에서 단 한 가지를 추구하지. 그건 자기 자신의 쾌락이야」
위대한 화가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보는 방식으로 자연을 보도록 강요하네. 하지만 다음 세대에는 또 다른 화가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지.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그 사람 자체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대 화가를 통해 평가하네. 바르비종 화가들은 우리 아버지 세대에게 나무는 이러이러하게 본다고 가르쳤지. 그런데 마네가 나타나서 다른 방식으로 그리니까 사람들은 나무가 그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거야. 어떤화가가 나무를 그런 식으로 볼 뿐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단 말이네. 그린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을 밖으로 표출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네. 우리가 우리의 시각을 세상 사람들에게 강제하게 되면 세상은 우리를 위대한 화가라고 부르지. 그러지 못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무시해. 그러나 우리 자신은 마찬가지야.
위대하다든가 시시하다든가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그리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중요하지 않아. 그리는 동안 우리는 그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다 얻었으니까
「자네가 내 충고를 바란다면 말일세, 이렇게 말하고 싶네.
용기를 내어 딴 일에 운을 걸어보라고 말일세. 가혹하게 들릴지모르겠네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이거네. 내가 자네 나이때 누가내게 그런 충고를 해주었다면, 그리고 내가 그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정말 얼마나 좋았을까 싶네」
「그 점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남의 충고에 따라 옳은 일을 하여 얻는 것보다 스스로 애쓰다 잘못한 실수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요. 저는 제 하고 싶은 것을 해본 거예요. 그리고 이제 생활을 정돈해도 나쁠것 없구요」
「모퉁이 저편에 경찰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되,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르라」철저한 정신의 자유, 그것이 파리 생활에서 얻은 최고의 수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그는 완전한 자유를 얻었음을 느꼈다.
철학자의 사상이란 그 사람 자체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점을 알면 그 사람이 쓴 철학을 대개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되어먹은 대로 생각하는 것 같기만 하다. 진리란 사상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진리라는 것은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저마다 철학자이며, 과거의 위대한인물들이 세워놓은 정교한 사상 체계라는 것도 그것을 쓴 본인들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요컨대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며, 그러고 나면 철학 체계는 저절로 형성되어 나왔던 것이다.
필립에게는 알아내야 할 것이 세 가지라고 여겨졌다. 사람과 그가 몸담고 사는 세계와의 관계, 사람과 그가 함께 어울려 사는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사람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그것이었다. 필립은 정교하게 연구 계획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