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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처럼 비지처럼
  • 이선진
  • 5,850원 (10%320)
  • 2024-10-25
  • : 555

[조금씩 나아가는 우리 사랑]

 

『빛처럼 비지처럼』은 4대째 손두붓집을 하고 있는 남매의 이야기이다. 오빠 ‘옹순모’가 엄마에게 커밍아웃하고 두부로 싸대기를 맞은 것을 본 동생 ‘옹모란’은 본인도 같은 처지이지만 고백하고 싶은 마음을 접고 살아간다. 그래도 애인 ‘유정’과 연애하며 불안하지만 해사한 사랑을 지켜간다. 그러다 오빠 순모가 어플로만 연락하던 애인을 만나러 간다는 이야기에 그들 모두 동행하게 되는데. 세 명이서 두 대의 자전거를 끌고 약속 장소에서 만난 건 말해줬던 나이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어수룩한 ‘세중’이다. 넷은 과연 어떻게 될까.


순모와 모란 남매의 밍숭맹숭한 말장난에서 두부 맛이 느껴지는 귀여운 소설이었다. 처음에는 비지라는 소재가 소설과 어떻게 연관될지 상상이 안 갔는데 남매를 보다 보니 두부에서 살짝 떨어져 나온 비지와 비슷한 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지는 두부 생산 과정의 부산물이다. 잘 알다시피 두부는 불린 콩을 매에 갈아 간수를 넣어 엉기게 만드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나오는 콩 일부가 비지가 되는 것이다. 합쳐지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콩이 두부가 아닌 비지라고 불리는 건 어찌 보면 조금 억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뭉쳐지지 못해서 두부라 불리지 못하다니.


뭐처럼 굴어야 하느냐는 세중의 말에 모란이 홀로 중얼거린 말이 기억에 남는다. 어수룩하게 거짓말을 하며 세상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은 세중을 보며 모란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짜증 나고 이해할 수 없는 세중에게 그렇게 살라 말하고 싶었겠지. 모란은 모란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을 테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고민을 해야 하는 남매는 자신을 탓하다 가도 이런 세상을 억울해하다 다시 자신을 탓한다. 뭉쳐지지 않은 잘못으로, 너를 좋아해서. 내 마음에 솔직해서 두부가 아닌 비지가 된 그들은 어쩌면 가장 순수한 사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침이 되면 비춰오는 빛처럼 1년이 다 돼가면 찾아오는 크리스마스처럼 모란이 유정을 사랑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 문제는 다른 사람들은 나를 비켜날 수 있어도, 나는 죽었다 깨나도 나 자신을 비켜날 수 없다는 거였다. 브레이크가 안 듣는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을 내달릴 때처럼 속도가 감당 못할 만큼 빨라지는데 이 세상 모든 나쁨이 내게 길을 터주는데 삶의 막다른 길목으로 접어드는데 나는 내 사람에서 도저히 중도 하차할 수가 없었다. 버리는 시간 버리는 마음 버리는 삶인 셈 칠 수 없었다. p.56


🏷️ 이게 눈 감고 제자리에서 몇 초만 걸으면 몸이 어느 쪽으로 틀어졌는지 알 수 있대. 걸음걸이도 주인을 닮아서 지금껏 자기가 살아온 방향으로 삐뚤어지는 거래. P.60


🏷️ 그러니까 저 어딘가 창백하고 붕 떠 있는 듯한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그럼 자전거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영혼도 자전거만큼 빠르게 달릴 수 없어서 자전거로도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으스스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내 소설 속의 인물들의 영혼도 여기 어디쯤을 거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 왠지 모를 위로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내 소설 속의 인물들이 자신의 영혼을 버려두고 오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p.80 작업 일기 자전거를 타는 상상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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