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을 잃은 트라우마로 모든 순간을 기록해야 하는 강박을 얻게 된 한기록. 부모님은 동생이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졌다고 말하지만 꿈에서는 아파트가 아닌 절벽이 자주 떠오른다. 어느 날 꿈에서 본 절벽이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절벽이 있는 장소를 찾아가고, 그 절벽 위에 세운 집에서 동생과 똑같은 이름의 아이를 만나게 되는데...
본작은 근미래라는 배경을 통해 서사에 필요한 여러 테크놀로지적 편의장치(AI, 드론, 모빌리티 기술 등)를 배치한다. 곧 실용화 될 법한 이러한 장치들은 SF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더욱 인간에 집중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나는 특히 주인공이 건네는 어린이용 VR안경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다. 보통 이런 장치에 대한 묘사는 "어린이용 사이즈의 제품"이라는 설명이면 충분할텐데 이 책에서는 사이즈 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시력과 초점을 맞추는 신체 기능을 보호하는 용도를 가지고 있다는 설명까지 추가된다. 평소에 세상과 등지고 사는 듯한 행색의 주인공이 사실은 얼마나 섬세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인지, 한편으로는 그 섬세한 내면이 25년간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느끼게 한다.
주요 등장인물인 한기록과 선우기억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신기할 정도로 자신의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남을 해치지 않는다. 한기록은 평생을 자책으로 살아가며 이름 그대로 모든 것을 기록하는 데 집착할 뿐 자신의 무너진 삶을 향해 짜증 한번 내지 않으며, 학대당하는 선우기억은 아픔을 삼킬 뿐 눈물을 전혀 흘리지 않는다.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유익보다 타인을 위하는 모습은 두 사람이 그야말로 뿌리부터 선한 인물들이며, 서로를 치유할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이야기가 1권이니 아직 드러나지 않은 흑막(?)이 이들의 선함과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혹은 또 다른 상처입은 인간의 내면과 회복의 이야기가 될 것인지는 앞으로 작가의 손끝에 달렸다.
작중 인간관계에 음악이 적지 않은 비중으로 나타나고 있기에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 재밌게 볼 수 있을 작품. 현재 전2권 중 1권이 출간되었고 2025년중 2권 출간 예정이니 일단 1권부터 사 두기 바란다.
글쓰기는 고독한 일이며 그 길고 힘든 작업을 응원하는 제일 쉬운 방법은 작품을 읽어주는 것이다(읽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 더욱 좋다). 젊은 작가의 초판 1쇄(이제 곧 2쇄)본을 사는 것은 미래에 가슴을 펴고 자랑할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