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가치를 느끼다
tkwk4912 2024/07/09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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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인
-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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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2
- : 59,096
일상에서의 진실 법정에서의 진실, 어떠한 순간에서도 일체의 거짓을 거부한 사람. 때론 진실이 창피나 어색함 더 나아가 무례로 비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린 이러한 솔직함을 싫어한다. 하지만 뫼르소는 무례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솔직한 사람이었다. 단지 그 사실이 주위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뿐이었다. 뫼르소가 판사가 뇌까리는 말을 그만 듣고 싶다며 이해한 척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그 듣기 싫은 말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지지만 곧 다시 실토한다. 판사는 자기 앞에서 이토록 무정한 사라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모두 회개의 눈물을 흘렸으니 말이다. 인간의 손때가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상태만이 자연이라는 것이다. 인공 호수 공원 관광지 모두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변형과 왜곡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부조리에 대척점에 서야할 것이 있다면 바로 재판이다. 하지만 재판은 엉망진창이다. 살인의 근거로 뫼르소의 됨됨이를 내민다. 그는 어머니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마셨다는 이유로, 장례 다음 날에 코미디 영화와 여자와 정사를 벌였다는 이유로 냉담한 사람으로 불려야 했다. 자신이 타인에 의해서 어떤 사람으로 정해진다는 것은 지극히 수동적인 일이다. 우리가 태어난 일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피투성)이다. 모순이게도 재판 또한 부조리하다. 검사는 피고의 영혼을 들여보았다는 영적이고 비현실적인 발언으로 배심원의 마음에 승리의 도장을 찍는다. 재판에서 오가는 언행에는 과장과 축소가 판을 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뫼르소는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지를 극악무도한 범죄자로 낙인 찍혔다. 뫼르소는 자신이 범행을 저지른 이유로 태양 때문이란 말을 하는데, 내 생각에 태양은 자연환경 즉 부조리와 반대되는 합리성 규칙성이다. 다들 알다시피 자연은 인간과 달리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심히 본능적이어서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부조리란 비합리성 비논리성이다. 최근 시청역 교통 사고에서 죽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유가 있는가? 아니 없다. 그들은 불운했을 뿐이다. 그렇다. 세상은 비합리적인 것 투성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착하게 살아야 좋은 일이 생긴다는 말을 많이 들으며 살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 부조리하니까! 뫼르소는 세상의 부조리를 가장 잘 절감한 인물이다. 그래서 세상사에 무관심했다. 우리의 노력 열정 지식과는 무관히 세상은 우리에게 무작위로 재앙을 내릴 수도 축복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런 사실을 깨달았기에 그는 무기력했다. 시지프 신화에서 돌을 산 꼭대기 위에 애써 올려놓아도 다시 떨어진다. 그리고 또 올려놓아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간은 그런 형벌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마리가 사랑하느냐는 질문에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단지 그는 어머니가 죽지 않았으면 더 좋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카뮈의 철학은 부조리의 철학이다. 그렇다면 뫼르소 같이 우리는 삶을 무기력하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삶은 별 의미 없이 세상의 우연에 따라 좌지우지하니 말이다. 노력해도 별 소용없으니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알 수 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그곳에서 엄마는 마팀내 해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마지막 말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뫼르소는 변했다. 바다에 떠있는 부표처럼 떠다니던 그가 생에의 의지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부조리에 대한 반항심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의 끝이 사형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난다면 무기력한 삶으로 끝났다면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뫼르소도 죽음 앞에서 변했다. 그래 우리의 삶은 무척이나 부조리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그저 받아들이기만 해선 안 된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 사형수다. 그렇기에 지금 죽나 나중에 죽나 그것이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뫼르소처럼) 아니다. 우리는 그 한계점에서 생에의 가치를 느낀다. 무한한 삶을 살지 않기에 가치를 느낀다. 영생을 살았다면 아마 뫼르소처럼 모든 것에 무의미를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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