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오랜
기간 가장 인기 있는 외국소설은 아마도 삼국지(삼국연의)가 아닐까 싶다. 후한 말 약 100여년간의 기간에 출현했던 다양한 인간군상들과 영웅들의 부침 등이 세상 덧없음을 보여주어 시간차를 두고 읽을
때 마다 본인의 연령, 상황 등에 따라 각기 다른 인물들이 눈에 띄고 이로 인해 새로운 감흥을 느끼게
해주니 여유가 생길 때 거듭 읽어볼 만 하다. 그러나 개인적인 소견으로볼때, 중국의 외교부 공식 발표 등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들이 대부분 전고가 있는 이야기에서 가져오고 있는 것을 자주
접하면서 중국에서는 삼국연의보다 그 프리퀄 성격이 강한 서한연의가 더욱 인기가 좋은 것 같다. 동주시대(춘추전국시대)가 저물고 진시황의 통일로 혼란에서 안정으로 바뀐 듯
하나 진시황 사후 급격히 몰락해 버린 통일제국 진나라…그 멸망을 위해 앞다투어 달려온 두 영웅의 이야기가
바로 서한연의 이고 우리나라에는 삼국지의 영향 때문인지 초한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학생시절부터 사마천의
사기를 탐독해왔고 그래서 초한지 또한 정비석, 이문열 등 대표적인 작가들의 작품으로 여러 차례 읽고
또 읽곤 했다. 그러던 지난 2019년 교유서가에서 나온
김영문의 원본 초한지(3권)가 출간되면서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초한지의 개념이나 위상 또한 크게 바뀌었고 이문열의 초한지가 출판사와의 문제로 현재 절판된 상황이다.
이러한 시점에 김팔봉 초한지가 재출간 되었다. 6·25전쟁이 막 끝나고 휴전상태에 있던
1954년 3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통일천하’라는
이름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되었고 1984년에 ‘초한지’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단행본으로 펴냈던 것을 다시 현대적 감각으로 일부 교정한 후 무려 36년만에 재 출간되었다고 한다. 최초 연재 시점부터 계산해보면 66년만이다.
김팔봉 초한지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조선시대에도 언문본이 있었으나 현대에 번역된 초한지의 효시에
해당하면서도 그 저본을 밝히지 않아 창작소설인지 번역소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 초한지가 원래
10권의 분량이 나올 소재는 아니고 예전에 읽었던 김팔봉 초한지 딱 이 정도가 적당한 분량이다라는 이야기
등등…그런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내겐 이 책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던 80년대 후반에 이미 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고려원에서 나온 정비석 초한지
뿐이었다. 고증면에서 다소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사실 읽는 재미도 있었고 아마 무엇보다도 300만 부가 넘게 팔렸다는 소설 손자병법의
성공과 더불어 고려원에서 당시 TV광고도 많이 하고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간 궁금해 하던
책의 재출간 소식을 듣고 지난 연휴기간을 이용해 인근에 새로 문을 연 구립도서관에서 빌려와 세권을 완독했다. 책을 읽기
전, 요즘처럼 번역본도 다양하고 해외의 원본을 직접 구하기도 쉽고 인터넷에도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가
아닌, 66년전 그 옛날, 아마도 일본어로 된 책을 한국어로
옮긴 중역(重譯)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새롭게 나온 책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변형된, 어떤 번역보다도 역자의 노고가 깊게 서려있는 팔봉 선생의 초한지’ 라고
소개가 되어 있어 의혹은 더욱 커졌다. 완전 옛 고어체로 일관하거나 중국역사소설답지 않게 일본식 한자
표현 등이 나오거나 혹은 이름만 초한지 일뿐 완전히 새로운, 즉 전혀 초한지 답지 않은 조선후기 홍길동식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등등의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최근 사마천의 사기 완역본을 구입하여
원문과 함께 독파하고 중국CCTV의 백가강단에서 왕리췬, 이중톈등
스타강사들의 사기 및 초한지강의까지 섭렵하고 난 후인지라 나에겐 아마도 약간의 거만한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일독한 결과는 우려했던 바와 많이 달랐다. 일본식 번역문투는 커녕 오히려 중국고문체의 느낌도 일부 살아있다. 역시 책은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는 게 맞나 보다.
예상과 달리 스토리
전개는 비교적 원본 서한연의에 충실한 편이며 각주나 삽화, 한시, 옮긴
이의 개인적 평가 등이 거의 들어있지 않았다.(이 부분은 독자 개인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그러다보니 쉬운 문체로 스토리에만 집중하여 속도감 있게 서사를 즐기기에 적합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 4장의 컬러 지도가 들어 있어 시기별 세력의 변화가 한 눈에 들어와
읽기에도 매우 편했고 표지 디자인도 매우 깔끔할 뿐 아니라 매 권 말미에는 주요인물 해설이 있어서 초한지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출판사측에서 많은 배려를 한 듯 하다.
또 한 편으로
재미있는 점은 호칭과 관련해서이다. 예를 들어 사또나 이방과 같은 관리의 호칭이 나오는데 역사적 고증을
떠나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정서에 친근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꽤 독특했다.
굳이 아쉬운 점을
들자면 지명중에서 형양성을 영양성으로, 오창을 고창으로 표기한 것은 다소 혼란스럽다.
김팔봉
초한지는 특히 일부 선정적이거나 잔인한 묘사,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세밀한 등장인물의 심리묘사, 또는 정사와의 비교나 역사평, 후세의 평가를 나타내는 한시 및 시가
등이 없어 부담없이 재미있게 초한지를 즐기고 싶어하는 분들의 입문용으로 적합하다고 보며, 학생들이 읽기에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어린이용을 제외하고, 정비석
초한지, 이문열 초한지, 김영문 원본 초한지 이렇게 거의
셋으로 나뉘어진 초한지 시장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선택지가 나왔다는 점에서 매우 환영할 만 하다. 책날개를 보니 김팔봉 수호지 10권짜리가 곧 출간 예정이라 하는 바, 팔봉 선생의 술술 잘 읽혀지는
글 맛을 본 이상, 언제인지 모르지만 출간되면 한번 읽어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오래되어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의미있는 판본을, 재출간을 통하여 오늘에 다시 되살려놓아 새로운 독자들과 만날 수 있게
해준 문예춘추사측에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신은 군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잘 쓰옵지요..."
"그렇다면 어째서 경이 짐에게 사로잡혀왔는가?"
"폐하께서는 군사는 잘 쓰시지 못하오나 대장들을 잘 쓰시는 까닭이옵니다. 이때문에 신이 사로잡힌 것이옵니다. 그리고 폐하는 인력으로 항거하지 못할 만큼 하늘의 도우심이 있는 폐하이시옵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겉으로 유쾌한 듯이 크게 웃기는 했으나 황제의 마음속에서는, 한신이 자신을 업신여기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더욱 의심하고 경계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날, 한신은 황제 앞에서 물러나와 집에 돌아가서도 마음이 유쾌하지 못했다.- P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