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도 열국지도 그리고 초한지 역시 이제는 정역본이 대세인 듯 하다. 그동안 원본이 없는, 즉 근본없는 작품으로 저평가 되어온 초한지를 원본 완역했다는 커다란 의미외에도, 내 개인적인 시각으로 볼 때, 이번에 김영문님이 번역하신 원본 초한지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는 다른 초한지에서 과감히 삭제해버렸던 한시와 노래들을 원문과 함께 복원해 놓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초한지는 스토리 전개만 따라가도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이번 원본 초한지의 한시와 노래들은 해석 옆에 원문을 나란히 병기해 줌으로써 좀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국내의 다른 초한지와는 확연히 다른 차별성을 갖게 해주는 요소인 것이다. 이는 초한지제에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에 기반한, 거리의 공연예술로 또는 장회소설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정서와 평가가 축적되고 반영된 것을 보여주며, 한편으로는 해당 대목의 상황을 더욱 임팩트있게 표현 해주는 소설적 장치로서도 그 역할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금의야행(錦衣夜行)이라는 사자성어의 유래가 되는 부분이 그렇다.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긴장감 넘치는 홍문연에서 유방을 제거할 기회를 스스로 놓아버린 항우, 그가 장차 고향인 동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대목에서 사서와 소설로서의 초한지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소설은 픽션이 가미되어 스토리 자체가 사서와 일부 다르게 전개되는 이유도 있지만, 위에서 말한 한시, 노래 등이 보여주는 기능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그 느낌이 더욱 생생히 전달되는 듯 하다.
우선 사마천의 사기 항우본기를 보면 항우가 자신도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뜻을 밝히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부귀해진 뒤 귀향하지 않는 것은 富貴不歸故鄕
마치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소 如衣繡夜行
그리하면 누가 이를 알아주겠소? 誰知之者
이를 보고 "초나라 사람은 목욕한 원숭이가 관을 쓴 것일 뿐이다." 라며 반대의견을 드러낸 사람을 즉시 팽살하는 항우...역시 카리스마 넘치는 독불장군같은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에 반해 원본 초한지에서는 시간이 조금 뒤로 흘러 이미 제후들에게 분봉을 마치고 유방이 촉으로 떠난 후 장량이 잔도를 불태우며 홀로 되돌아와 항우를 함양에서 떠나 동쪽 초나라땅으로 돌아가게 할 목적으로 아이들에게 아래와 같은 동요를 가르쳐주고 거리에서 부르고 다니도록하며 여론전에 나선다.
지금 어떤 사람이, 今有一人
벽 너머에서 방울을 흔드네. 隔壁搖鈴
소리만 들리고, 只聞其聲
모습은 보이지 않네. 不見其形
부귀를 얻고도 고향에 안 가면, 當貴不還鄕
비단옷 입고 밤길 가는 거라네. 如錦衣夜行
이 노래를 들은 항우는 이 동요가 하늘이 내린 것이고, 자신의 뜻과 같다면서 함양을 떠날 생각을 굳히게 되고 결국 장량의 계책대로 동쪽 팽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는 향후 유방이 재기에 성공해 중원을 제패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하는 계기가 된다. 즉 장량의 정치적 선전공세에 휘말린 항우가 유방을 견제할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초나라 땅으로 돌아가 버리게 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여기서 이 동요가 주는 느낌이 참으로 생동감 넘친다.
굳이 요약해보면 방울소리와 비단옷은 성공 또는 출세를 나타내고, 벽 너머와 밤길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보람없는 행동을 의미한다. 어두운 밤길의 비단옷과 벽 너머에서 들리는 방울소리...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져 항우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 마음이 영상을 보는 듯 그려지는 느낌이다.
이 책을 읽는 분들만큼은 단시간내에 빨리 읽어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한시나 노래등이 나올때 향이 좋은 차를 우려 마시듯 찬찬히 음미해 가며 독서를 즐겨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원본 초한지는 역사라기보다는 문학이나 예술의 측면에서 즐기고 감상하는 것이 적합할 듯 하다. 원본 초한지에 이어서, 신동준님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작고하신 '사서로 읽는 항우와 유방'이라는 책을 읽어 보았는데, 초한지제의 실제 역사와 당시 정치적 세력들이 처했던 상황에 대한 국내외 전문가들의 예리하고 명쾌한 주장과 해석들을 접할 수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비유가 정확할지 모르겠으나 마치 김구용 또는 황석영 삼국지와 같은 정역본을 읽은 후 이중톈의 삼국지강의를 읽었을 때와 같이, 머릿속에서 문학과 역사가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