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훌_문경민, 문학동네
숲속집 2022/02/20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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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 - 2022-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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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기록할 책은 제12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수상작, 문경민 작가의 《훌훌》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인 유리와 담임선생님의 상담시간. 유리가 쓴 자기소개서를 보며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잔잔하게 지나갑니다. 유리에게는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사정이 있지만 친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밝고 재미있는 아이들과 학교생활도 무난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엄마가 죽었다는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유리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입니다. 유리를 입양했던 사람, 고작 3년만 함께 살다가 떠난 엄마 서정희씨가 이제 이 세상 사람도 아니라고 합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연우라는 열한 살짜리 남자아이가 왔습니다. 유리처럼 아빠를 모르지만 연우는 유리와 다르게 엄마 서정희 씨가 낳은 아이입니다. 유리는 어렸을 때 갓난아기였던 연우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 아기를 귀찮아하며 거칠게 대하던 엄마를 본 게 마지막 기억이기도 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혼자 잠든 내 방에 불쑥 들어와 온몸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떠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괜한 소외감과 괜한 억울함, 괜한 서러움이 마음속 각기 다른 그릇에 담겨 찰랑거렸다. 찰랑거리던 그것들이 조금이라도 넘쳐 주르륵 흘러내리는 날이면 나는 잠깐 돌아버렸다. (본문 19쪽)
유리의 기억에 남아있는, 그 시절 감당하기 어려웠을 감정들이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사려깊은 담임선생님과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들어줄 것 같은 친한 친구들에게도 선뜻 털어놓지 못 하는 유리의 마음들을 읽는 입장에서는 자세히 알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좀처럼 곁을 내어 주지 않는 할아버지의 집을 떠나 멀리 떨어진 대학교에 다니며 독립적으로 살고 싶어서 학원에는 못 다녀도 인강에 의지하며 혼자 공부하는 아이, 유리는 이제 겨우 고2였어요.
그런 유리 앞에 닥친 일들은 유일한 인생 계획마저 흔들어버렸고, 일상도 고단하고 복잡하게 돌아가게 만들었어요. 몇 주에 한번씩 여행을 떠나는 할아버지, 그럴 때마다 혼자 돌봐야 했던 연우라는 낯선 아이까지. 유리는 한숨이 나오는 상황 앞에서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할 일은 해야 했다. 설거지 같은 일이었다. 식탁에 밥 한 공기 더 올리면 되는, 딱 그 정도의 일이었다." 고 말입니다. 실제로 연우에게 밥을 해먹이는 것도 유리의 일이었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닌 걸 아니까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깝던지요. 그나마 연우와 유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설거지 정도는 연우가 맡아서 하기는 했지만요.
유리가 내면이 단단하다는 게 느껴지고 담담하게 표현을 하니까 이 아이들보다 더 슬퍼하지 말자, 이 아이들을 힘들게 자라게 만든 어른들의 처지 또한 다 알지도 못 하면서 함부로 비난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읽어야 했습니다.
유리는 친엄마가 누군지 알지 못 하고, 입양해준 엄마도 곁을 떠나 외롭게 자라왔어요. 또, 연우는 친엄마와 살면서 지속적인 방임과 학대 피해를 당한 걸로 보이고요. 게다가 그 엄마가 목숨을 버리는 순간까지 목격하고, 사인 규명 절차를 빌미로 소년보호재판에 가야 했어요.
아이들이 뜻밖의 상황에 놓일 때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할아버지의 부재는 더 큰 난관이 되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에게도 사정이 있었어요. 유리는 이미 할아버지가 여행을 다니시는 게 아니고 병원에 계시다 나온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거든요.
어른의 보호를 충분히 받지 못 하는 아이들과 편찮으신 할아버지가 한집에 사는 게 얼마나 불행하고 막막한 일일까 내 감정을 앞세워 판단하는 게 짧은 생각이었다는 걸 유리는 사람에게 거리를 두는 게 아닌 다가서는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중반 이후의 일들까지 늘어놓는 것은 읽는 즐거움을 반감시킬 뿐이니 자세히 기록하거나 인용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유리의 방식은 확실히 선을 긋는 게 아니라 선을 약간 넘어가 궁금한 것을 묻고, 문제를 풀어가는 쪽으로 잡혀갑니다. 그 방식은 할아버지와 연우 사이에서도, 저마다 고민과 비밀이 있었던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잘 맞는 열쇠가 되곤 했습니다.
알고보면 할아버지도 연우도 친구들도 유리도 멘탈갑 선생님 역시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깨지기 쉬운 존재였다는 데 생각이 닿습니다. 반대로 깨지기 쉽지만 보기보다 단단한 유리같은 존재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오붓한 가족이어도, 죽고 못 사는 친구여도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건강한 관계를 길게 유지하는 법이라는 오랜 믿음에 조금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적정선에서 거리를 좁히는 용기도 낼 줄 알아야 한다는 걸 유리에게 배웠습니다. 한발 다가서야 손이 닿을 테니까요.
유리가 훌훌 털고 떠나고 싶었던 건 유리를 대하는 표정이나 말투나 모든 게 단단한 할아버지와 그 집이었어요. 과거와 단절된 채 혼자 사는 게 꿈이었지요. 그런데 과거를 직면하고, 입 밖으로 털어놨을 때, 나의 아픔을 이해받고, 한편 다른 사람의 슬픔을 이해했을 때 무거운 마음을 조금씩 덜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책을 덮고나서 '훌훌'이라는 제목의 가벼움이 더 좋아진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감추는 일은 반복할 때마다 익숙해졌다. 어느 지점에서 입술을 얇게 다물어야 하는지, 어디에서 시선을 돌리거나 화제를 바꿔야 할지 자연스레 터득했다. 문제는 알 수 없는 수치심이었다. 내 처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 배신감 같은 감정이 일렁일 때면 항상 수치심도 함께 움찔거렸다.
반복되는 너절하고 복잡한 기분이 싫었다. 내 과거를 끊어 내고 싶었다. 없던 시절로 치워 버리고 싶었고 뒤도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그러고 잘 살았다. 서정희 씨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입양으로 시작되는 내 과거 따위 없는 셈 치고 잘 살아갔을 터였다. (본문 20쪽)
나는 팔짱을 끼고 연우를 내려다보았다. 연우의 옆얼굴에서 또 엄마 서정희 씨가 보였고 속에서 독한 감정이 한 줄기 피어올랐다. 엄마 서정희 씨가 싫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장난감은 아니잖아? 몇 년 키우고 관둘 거면 입양은 왜 했어? 이제까지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되풀이했다. 연우를 볼 때마다 엄마 서정희 씨를 떠올리게 될 것 같았다.
"밥 차려 놓을 테니까 배고프면 먹어."
연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쩐지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거실 창문 너머 마당의 연우를 쳐다보았다. 금방 들어올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할아버지 분위기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했다. 할아버지와 지내던 것처럼 지내면 됐다. 거리를 두면 됐다. 연우 때문에 기분 상할 이유도 없었다. 아빠를 찾는 대로 곧 떠나게 될 아이였다. (본문 24~25쪽)
나를 버리고 가붓하게 떠났으면 최소한 잘 살기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자기 몸으로 낳은 자식이면 살갑게 대해 주고 사랑해 주고 아껴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죽음을 맞으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지막으로 무엇을 보았을까. 그녀가 들었을 소리는, 그녀가 느꼈을 감촉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생각했다. 아들의 손에 밀렸든, 혹은 사고였든, 그토록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건 서정희 씨가 어떤 사람이었느냐와 무관하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본문 80~81쪽)
수업을 마치고 연우네 학교로 향했다. 보도와 차도 사이에 바람에 쓸린 연분홍색 꽃잎들이 고여 있었다. 까만 정수리가 내려다보이는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가방을 메고 무리 지어 내 옆을 지나갔다. 따듯하고 맑은 날씨였다. 바람도 선선했다. 학교 옆 근린공원에서 헬륨가스를 채운 풍선을 든 아이들이 꺅꺅거리며 뛰놀았다.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아주머니, 할아버지들이 보였고 한가로운 얼굴로 고개를 젖혀 분홍 꽃비를 맞는 연인들도 보였다. 엄마 서정희 씨는 이제는 이 풍경을 누리지 못하겠구나, 잠깐 생각했다. (본문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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