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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마
  • 책방에서 빗소리를 들었다
  • 김은지
  • 9,000원 (10%500)
  • 2019-03-25
  • : 332

축제



술을 마시고 손을 맞잡고

가장 슬픈 이야기를 하나씩 털어놓았다


형이 잘못 사는 얘기

그녀가 잘못 떠난 얘기

질투, 못지않은 억울함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난


손 잡은 사람 이야기에 울고 있는데

화장실에 갔던 한 명이 뛰어나와

이거 십오 일 전에 삼켰던 약이 명치에 걸려 있었나 봐 라며

토해 낸 알약을 보여 줬다


우리는 모두 기뻐 일어나

술상을 가운데에 두고 박수를 치며 춤을 추려는데

창가에서, 벽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소리로

“이제 그만 잡시다. 좀.”

옆집 사람의 한 마디


잠에서 깼을 때

우리가 꺼낸 알약은 보이지 않았다

꾸벅 꾸벅

약이 놓여 있었던 것 같은 곳을

쓸어 보았다


  시에서 제목이 필요한 이유 같은 걸 훌쩍 뛰어 넘어, 제목이란 무엇인가를 몸으로 감각하게 하는 시이다. 제목이 내용을 감싸안으면서 시 안의 모든 장면과 단어들을 별안간 반짝거리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싱싱했던 한밤의 놀이와 청춘의 시간들이 지나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언제나 그 기억들로부터 너무 멀리 쫓겨나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런 허망함이 결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선망과 그리움을 지우지는 못한다. 우리가 둘러앉아 서로에게 서로를 조금씩 떼어주던 그 시간은 너무 힘이 세고, 또 우리는 삶을 긍정할 줄 아는 충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에 대해 “축제”라는 이름의 제목을 붙인 시인은 ‘우리’의 그 명랑과 긍정의 힘을 넘치도록 잘 아는 사람이 아닐까. 저마다의 지금을 앓는 우리가 우리 안의 잃었던 힘들을 어서 회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다정한 사람, 그런 맑은 사람의 힘이 이 시집 『책방에서 빗소리를 들었다』의 도처에, 작은 빛처럼 박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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