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서영 시인의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에 실린 몇 편의 시는 혼자만 몰래 보고 싶고 아끼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 여기.
혼혈 양은 슬픔
흰 양과 검은 염소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을 지프라 한다지. 달려가 혼혈을 안으려고 했더니 긴 발로 껑충껑충 달아나 버렸다. 사랑의 반점들을 잡을 수 없었지. 나와 너의 피가 한 줌씩 뒤섞인 지프geep. 아무도 없는 시간의 초원. 흩어진 살점들. 나의 배고픈 지프.
우리가 올랐던 초원에는 달의 간을 파먹는 지프가 살아. 서로의 입술을 바라보며 아득해지지. 산을 오르는 도중 검은 염소 무리를 본 적도 있다. 우린 고통스러운 기억의 혼혈을 낳았지. 뿔이 돋아난 영혼들에게 사랑이란 서로를 다치게 하는 일. 은하수엔 뿔의 가루가 흩어져 있어. 안개가 걷히고 밤의 무늬가 선명해지기 시작한 거야. 나는 무서운 시간에 손을 담그고 서 있어. 아름다운 초원의 지프와 함께.
어쩌면 우리는 모두 혼혈이고 혼종인 존재가 아닐까. 내 안의 다투는 모든 다름들을 승인할 때 그 모든 싸우는 것들을 오롯이 감싸안을 때, 다른 존재와의 사랑도 가능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