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을 만 하루에 걸쳐 다 읽었다. 마샤 홀 켈리의 『라일락 걸스』.
실로 오랜만에 가독성 좋은 작품을, 한동안 잃었던 듯한 나의 집중력을 되찾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작품을 만난 것이다. 작가가 미국의 대형 광고 회사 카피라이터로 활약하다 처음으로 쓴 소설이라지만, 그 탄탄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독일과 폴란드의 주요 거점을 돌며 취재한 뒤, 3년에 걸쳐서 쓴 작품이라 하니. 소설은 실재 인물과 사건을 최대한 반영하여 쓰였다고 한다. 다만, 일반 대중을 타깃으로 하다 보니, 사랑과 연애의 낭만적 서사가 적절히 가미되어 있다. 결말 역시 매끈하다. 충분히 울 수 있었고 위로받을 수 있었다.
소설은 나치 시절 독일에 있었던 유일한 여성 수용소인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아우슈비츠와 같은 일반 수용소에 있었던 노역과 처형(학살)에 더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신체 실험이 이루어졌던 곳. 그 실험 대상은 ‘래빗’이라 불렸다. 실험 토끼라는 의미도 있고, 실험으로 불구가 된 다리 때문에 토끼처럼 껑충거리며 다녔던 걸 비유하기도 했다.
소설은 세 명의 여성 주인공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 셋 중에는 그 수용소에 근무하면서 신체 실험을 행했던 헤르타 외버호이저도 있었다. 지면상에 할당된 부분은 가장 적었지만, 읽는 동안 가장 자주 멈춰 서서 생각하게 했던 인물. 헤르타는 그 일로 실제로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냉전 시기 독일의 비위를 맞추려던 미국 정부에 의해 5년 뒤 조용히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와 별개로 나는 헤르타가 수용소에서 일하게 되기 직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헤르타는 성적이 우수했고 외과의가 되길 원했지만 당시에 여성은 외과의가 될 수 없었다. 또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까지 병에 시달려 헤르타가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만 했는데, 헤르타가 가진 피부과 전문의 자격으로는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었다. 그래서 헤르타는 외삼촌이 하는 정육점에서 내장을 분리하는 일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내장이 온전히 한 번 분리될 때마다 어떤 의식처럼 외삼촌은 선 채로 헤르타를 강간했다. 헤르타는 그 지옥을 빠져나갈 궁리 끝에, 그리고 갈등 끝에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 근무하기로 마음 먹는다. 외삼촌으로부터의 도피, 경제적인 사정, 그리고 외과의로 일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유대인에 대한 가해자(전범)인 동시에 성폭력 피해자인 헤르타. 피해자라는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가 그곳 수용소였던 거라면, 우리는 그를 가해자라는 잘 재단된 이름, 단일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그는 분명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의 몸 위에 저질러진 반인륜적 성폭력 범죄에 대해서는 언제,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나.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또 한 가지, 수용소에서의 그 끔직한 장면들보다 더 나를 힘겹게 했던 건 수용소 이후의 삶이었다. 남은 자들의 남은 삶. 수많은 죽음들 곁에서 살아남았고 '죽음을 살아낸' 것에 가까운 자들이, 그 죽음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건 정말 가능했을까. 소설 역시 남겨진 자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텅 빈 눈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저 버텨내기만 해야 했는지, 수용소 시절을 떠올리거나 말하는 일 자체가 얼마나 큰 고통이었던지를 묘사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페이지의 끝은 어쩔 수 없이 치유와 회복을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기대어 위로받았지만 한편으론 그 매끈한 결말에 아쉬움이 남는 이유이다. 『이것이 인간인가』로 홀로코스트 증언 문학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줬던 프레모 레비도, 헤르타 뮐러와 함께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공동 집필하기로 했던 오스카 파스티오르도, 남은 자의 삶이란 가능하지 않다는 듯 별안간 떠나버리고 말았지 않나.
5년 전에 아버지를 보내고 나서 나는 1년 동안 매일같이 아버지 꿈을 꿨다. 아버지가 죽은 것은 내 잘못이 아닌데도, 나는 늘 꿈속에서 야단을 맞거나 도망을 다녔다. 내가 나를 응징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잃었다는 그 사실. 멀쩡하게 옆에서 걷고 멀쩡하게 서로를 부르던 어떤 한 사람이 이제 없다는 그 사실은 꼭, 세상이 나를 따돌리고 있는 기분이었달까. 니가 이상한 거야. 니가 멀쩡히 살아있는 게 이상한 거야, 하고 속삭이는 것 같은.
그런데 바로 눈앞에서, 내가 될 수도 있었던 그 죽음의 명단에 네 이름이 오르고, 그게 내가 아니라 네 이름이었다는 데 아파하는 동시에 안도했다면, 그렇게 해서 너는 죽고 나는 결국 살아서 온전히 그 명단 바깥으로 빠져나왔다면, 그 기분은 어떨까. 바로 옆에 멀쩡하게 있던 사람이 없고 그 없음/없어짐에 나의 웃음이 조금이라도 섞여 들어갔다면, 나의 귀에 세상은 뭐라고 속삭이는 것 같을까.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