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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마
  • 제가 왜 참아야 하죠?
  • 박신영
  • 13,320원 (10%740)
  • 2018-10-27
  • : 236

안희정의 이번 2심 판결은 1심 판결과 다르게, 피해자다움에 대한 심문이 아닌, 가해 당사자에 대한 심문이었다는 점, 그래서 위력을 이용한, 반복된 가해의 악의적 본질이 드러났다는 것을 변화의 핵심으로 꼽는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 대한 심문이었다는 데 박수를 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박수칠 일인가.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상식 아닌가. 어느 법정에서 가해자(피고인)가 아닌 피해자를 의심하고 심문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 사회는 여성이 입은 성폭력 피해에 있어서는 예외적 상식을 들이대기 일쑤였다. 그것은 상식 바깥의 영역, 남성들을 위해 예비된 ‘성역’의 공간이었다. 그 성역의 한 귀퉁이가 무너질 수도 있음을 보여준 판결이라는 점에서 이번 판결을, 상식의 승리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안희정 사건은 개인적 성폭력 사건인 동시에, 온 국민이 지켜보는 공공의 사건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중요했고 더 많은 이들이 그 싸움의 과정과 결과에 주목하기도 했을 것이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 판례로서도 중요하겠지만, 그 판결의 장면이 이 사회를 대표하는 장면으로서 누군가에게는 용기의 메시지를, 누군가에게는 경고의 메시지를 줄 것이기 때문에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아무도 봐주지 않고 함께 싸워주지 않는 고립된 공간에서 외롭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안희정 판결의 장면이 가 닿지 못하는 후미진 곳. 각자의 복잡한 사정들이 얽히고설켜 그 빛이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싸움을 겪어내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그곳. 『제가 왜 참아야 하죠?』를 쓴 박신영 작가 또한 그 싸움의 경험, 특히 승리의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작가는 미투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필두로 하여 자신의 싸움과 승리의 경험들을 차분하고 단단한 어조로 풀어나간다. 그는 우리나라의 미투 또한 우리들만의, 우리들 스스로가 일궈낸 경험으로 정의 내린다.

“미국 할리우드 미투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나라에서도 미투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미국 미투 운동은 2017년 10월 영화 제작사인 하비 와인스틴의 성범죄가 기사화된 후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미투’ 해시태그를 달기 시작하면서 확산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1년 전인 2016년 10월부터 ‘OO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를 달아 문화예술계의 성폭력을 고발해왔습니다.”

물론 TV에까지 얼굴을 드러내가며 서지현 검사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폭로한 데는, 세계적인 흐름과 분위기 또한 영향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트위터라는 엄연한 SNS 매체를 통해 공론화했던 우리 자신의 체험을 더욱 중대한 것으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박신영 작가의 이 언급은 의미가 크다고 본다.

안희정 사건과 판결의 그 화두이기도 했던 ‘피해자다움’과 연관하여 재미있게 읽은 챕터는 <“그러게 왜 그 시간에 그런 데 있었어”>였는데, 그 중 특히 유쾌하고 시원했던 비유를 나누고 싶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옷차림이 성폭력을 유발하니 조심해야 한다니요? 우리는 갓 구워진 빵이 진열대에 헐벗고 나와 있어도 훔쳐 먹지 않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냄새를 풍겨도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배달원을 때려눕히고 치킨을 훔쳐 먹지도 않습니다. 치킨이니까 당연히 유혹적인 것이지 치킨이 우리를 유혹한 것은 아닙니다.”

위에 인용한 내용뿐 아니라, 이 책은 작가가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여성 ‘사회인’으로서, 그리고 ‘젊은’ 여성으로서 당해온 성폭력의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항해서 싸워 이겼던 경험을 주로 담고 있다. 승리의 기록은 작가가 건네받았던 ‘불기소 이유 통지문’, ‘지방법원판결문’과 함께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담겨 있기도 하다. 작가는 그것이 싸우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꼼꼼한 지도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다정한 친언니의 잔소리처럼 끝없이 이야기한다. 우리가 말하지 않고 우리가 잘 싸우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순간 꽃뱀과 마녀가 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내가 이렇게 앞장서고 있다고, 함께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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