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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런작당

식물 키우는 것을 무척 좋아해서 언제나 식물  책들은 관심 대상이었다. 처음 식물 책을 접한 건 식물들을 어떻게 하면 죽이지 않고 키울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으로 실용서적을 읽곤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식물이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식물 키우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했고 그렇게 찾아 읽은 책이 『식물 수집가』 『반려식물』『엄마의 꽃밥』이었다.

 

 

 

 

 

 

 

 

 

 

 

 

 

 

 

 

세 권의 책을 재밌게 읽긴 했지만 모두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담겨있어서 무척 아쉬웠다. 짤막한 이야기로 식물에 대한 사랑은 감지했지만 허기가 졌다. 더 깊고 더 풍부한 이야기할 책을 늘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호프 자런의 『랩걸』을 읽게 되었고 나는 이처럼 완벽한 부재를 단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부재로만 설명해도 끝날 정도로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안에 호프 자런의 20년의 세월이 담겨있는 것이다.

 

 

 

 

 

 

 

 

 

 

 

 

 

 

 

첫 시작은 유년기 시절의 기억이다. 과학자였던 아버지의 연구실을 놀이터 삼아 모든 기구들을 만져볼 수 있었던 행운 덕분인지 그녀는 과학자라는 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무뚝뚝함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북유럽 가족의 품에 안겨 정겨운 유년기를 보내지 못했노라 토로하는 호프 자런이지만 어머니와 함께 책을 읽고 아버지와 함께 과학자의 꿈을 꿀 수 있었던 환경만으로도 그녀가 안정적이며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엄마는 책을 읽는것도 일종의 노동이며, 각 문단마다 분투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나는 그런 식으로 어려운 책을 흡수하는 법을 배웠다"(p30)

 

" 과학은 나에게 모든 것이 처음 추측하는 것보다 복잡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발견 하는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레시피 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과학은 또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을 가르쳐줬다"(p49)

 

 

그리고 그녀는 혼자의 힘으로 여성 과학자로서의 길에 들어선다. 1969년 출생한 그녀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그 시절 여성 과학자로서의 길이 순탄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팟캐스트 <북 카페>에서 여성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여성 과학자분들이 계시지만 여성이라는 성별 때문에 차별을 당하고 가정과 일이라는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일이 많아서 진급하기도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더욱이 과학이라는 분야에 지원하는 여성들이 많지 않아 그녀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분들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가 자런의 이야기와 겹치면서 그녀의 길이 고단했음이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 그 대신 나는 내 삶을 구하기 위해 연구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남자에게 구속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부터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일했다. 시골 마을 결혼식을 거쳐 아이들을 낳고, 내 꿈을 펼치지 못한 실망감을 아이들에게 쏟아내면서 아이들의 미움을 받는 운명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그런 길을 걷는 대신 나는 진정한 성인이 되기 위한 길고도 외로운 여정을 거치기로 결심했다. 약속의 땅은 존재하지 않지만 종착지는 지금 이곳보다는 더 나은 곳일 것이라는 개척자들의 굳은 신념을 가지고 말이다."(p79)

 

 

이런 고단한 길 위에서 빌이라는 동반자를 만났다. 자런의 석박사 조교 시절 현장학습을 떠났던 날 우연찮게 토양을 진지하게 관찰하는 빌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런은 그와 함께 과학자로서의 길을 함께한다. 그런데 빌과의 호흡이 어찌나 잘 맞던지 나는 이 둘의 깨알 호흡에 깔깔거리며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리고 연구에 실패한 채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내게 콩코드 브리지를 넘어서까지 갈 수 있는 차만 있었어도 당장가서 그 나무들을 불 질러버리자고 할 텐데 말이야."

빌은 실험실 깔대기를 써서 감자칩 봉지 바닥에 남은 가루들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나무 하나가 타는 걸 다른 놈들한테 보여준 다음 이제 꽃 피우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 물어볼 수도 있고"(p112)

 

 

팽나무 씨앗에 오팔이 함유되어 있고, 달팽이 껍데기처럼 아라고나이트 결정체가 생긴다는 것을 찾아낸 자런은 그 실험을 위해 콜로라도 주 스털링 근처 사우스 플랫 강변에 갔다가 그해 꽃을 피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 한 채 돌아왔는데, 그런 자런을 위해 빌이 건넨 위로가 담긴 유머에 배꼽을 잡고 깔깔거렸다. 대체 나는 왜 이런 이야기가 좋은지. 나만큼 자런도 빌의 농담이 좋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이야기는 또 있다.

 

 

빌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빌이 한 달동안 연락이 없자 20년 지기 동지로써 자런은 빌의 아픔을 느끼며 갑작스러운 아일랜드 현장답사를 계획했고 아일랜드에 도착해 운전대를 잡았다. 그러나 무엇을 할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 상황인지라 빌이 어떤 계획이냐고 묻자 자런은 이렇게 대답한다. ' 레프리콘(아일랜드 만화에 나오는 작은 남자 요정)을 찾고 있는 중이야.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봐야 해"(p345) 이렇게 말을 던진 자런은 너무 혼란스러운 길 때문에 방향을 잃고 사이드 미러가 부러지는 사고를 내고야 말았다. 사고 소리를 들은 동네 주민 중에서 굉장히 아일랜드인처럼 생긴 키 작은 남자가 "카운티 클레어에는 도대체 왜 오셨수?"라고 묻자 그 사람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빌은 대답했다. "아저씨를 찾아 헤매고 있었던 거 같아요"(p347)라고. 다시 빵 터져 버린 나. 자런의 농담을 빌은 죽자고 받아주는 모습이 너무 웃기기도 했고 현장답사를 다니며 많은 사고에도 늘 태연자약하게 굴어주는 빌의 모습이 참 듬직하기도 했다. 그래서 짐작했다. 둘이 결혼하겠구나 하고.

 

 

그러나 내 짐작은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자런은 바람처럼 나타난 클린트라는 남자와 결혼을 했고 빌은 20년 지기 친구로서 묵묵히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내가 이런 배신감을 느껴야 하는지. 빌도 이런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으려나.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친구라서 한평생 과학자의 길을 함께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버드나무의 신비한 능력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는데 버드나무 한 그루 근방에 꼭 버드나무가 한 그루가 더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버드나무들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신기했다.

 

 

" 그러나 정말로 흥분되는 일은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라는 건강한 시트카 버드나무들, 즉 한 번도 공격을 당하지 않은 버드나무들도 텐드나방 애벌레들 입맛에 맞지 않는 화학물질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멀리서 자라는 건강한 나무들에서 딴 이파리들을 먹은 애벌레들도 시들시들하고 병이 들어 2년 전처럼 순식간에 숲을 파괴할 힘을 잃은 듯 보였다.

 

 과학자들도 뿌리에서 뿌리로 전달되는 신호 체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땅속에서 화학물을 분비해서 이루워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위 연구에서 관찰된 시트카 버드나무 두 집단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흙을 통해 의사전달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분명 땅 위에서 서로 신호를 주고받은 것이 분명했다. "(p240)

 

 

나무가 뿌리가 아닌 어떤 호르몬이나 어떤 가루로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런의 책을 읽고 있으면 작은 식물 개체 하나하나가 생존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식물들을 소중하게 다뤄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식물 학자답게 맺는말에 나무를 심어보자고 제안한다. 개발 위주의 현대문명 속에서는 점차 식물들이 사라져가고 그 결과 무시무시한 환경오염은 불 보듯 뻔하다는 이야기였지만, 작은 식물을 키우며 함께 성장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사에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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