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커
아뉴미온느 2010/12/3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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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렁커
- 고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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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 - 2010-11-29
: 445
멀쩡한 집을 놔두고 자동차 트렁크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의 이야기.
정말로 어딘가에 슬트모(슬리핑 트렁커들의 모임)라고 하는 비공개 카페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누구에게든지 안전하게 밀폐된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자 하는 욕구가 있을 것이다.
고은규 작가는 그걸 일컬어 안전에 대한 본능, 자궁으로의 회귀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오오 그럴듯해!
처음 책 제목이나 컨셉이나 짤막하게 보도자료에 나와있는 줄거리만 봤을적에는
그저 가볍고 즐거운 요즘 사람들의 이야기겠거니 (칙릿!) 했는데 워워워 절대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터치할 줄 아는 작가님 같으셔요 (찬사찬사찬사찬사)
책 속에는 두 사람의 남녀가 등장한다.
한명은 뜨거운 콩? 시도때도 없이 뚜껑열리는 머리? '온두' 라고도 하고 '까만아이' 라고도 하는
베이비앤마미의 베테랑 유모차 판매원으로 평범한 낮을 살아가는 트렁커 1인.
그리고 또 다른 한명은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위한 '치킨차차차' 라는 게임을 발명하여
온두와 함께 밤마다 서로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게임을 하는 이름이 '이름'인 트렁커 1인.
이 둘의 공통점은 트렁크에서 잠을 잔다는 것.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이 트렁커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는 이유.
이야기는 여러가지 갈레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
우선은 평범한 낮을 살아가는 베이비앤마미에서의 가시두더지, 온두의 일상이다.
뭐, 평범하다고는 하지만 트렁크에서 잠을 자는 밤에 비해 평범하다는 거지, 절대 평범하지 않다.
유모차를 사러 오는 고객들에게 친절하지도 않고 상냥하지도 않으며 웃지도 않고 다른 사원들처럼
열심히 판매하려하지도 않는다. 그저 온두는 고객의 특징에 맞는 유모차를 추천할 뿐,
사든말든.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물론 유모차 그 자체에 대한 애정만큼은 1등급이라서 사장도 예뻐라(까지는 아니지만 능력정도는 인정!)
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사원들과는 그렇게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않고, 그저 온두의 모습은
항상 인상쓰고 있고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미지로만 비춰지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 머리를 한
미송에게서는 맨날 종류별로 바꿔가면서 이상한 생물 닮았단 얘기나 듣고. 아 짜증나 미송이)
그리고 밤에는 수면주머니를 들고 멀쩡한 집을 떠나 공터에 있는 버려진 자동차 트렁크로 들어가는 삶.
그와 동시에 온두가 트렁크에 들어가게 된 과거의 기억들이 두서없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전혀 기억이 없다고 생각했던 (어쩌면 기억속에서 아예 잊어버리려고 했던) 부모님에 대한 기억과
그 이후 지내게 된 들피집(아니면 늘 피곤한 집)에서의 끔찍했던 기억들. 그리고 목사님과의 추억 속에
트렁크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만나게 되는 자동차 주인의 호의.
처음에는 그 까만아이가 온두를 말하는 것인지를 모른채, 또 온두의 머릿속에서 그려내고 있는
온갖 거짓과 상상 속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부모님과 동반자살할뻔하던 (스포스포스포스포) 그 얘기도
사실 첨부터 온두의 이야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런식으로 온두의 생활속에
기억의 파편처럼 하나 둘 씩 둥둥 떠다니던 기억인지 상상인지 거짓인지 실제인지 모르겠는 것들이
거의 다 온두의 (그냥 잃어버리고 싶은)과거였다는 것. 트렁커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지금은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상처이기도 했고 고통 그 자체였던 경험들.
사실, 이러한 온두의 이야기만큼이나 '름'의 이야기도 장난이 아니다.
우스꽝스럽고 어떤 부분에서는 혼자 낄낄거리면서 웃어버렸던. 전체적으로는 재치넘치는 재밌는
이야기임에는 분명하지만, 역시 그렇게 웃을수도 울수도 없는 그들의 과거가 정말 가관이 아니다 T_T
웬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위해서 게임까지 스스로 고안해낼 정도로 공을 들이는가 싶었는데
절대 잃어버리게 놔두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과거를 두고두고 되새겨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거.
과연 그 뒤에 숨겨져 있었던 름의 어마어마한 (온두만큼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과거는 정말
어휴. 정말이지, 온두도 그렇고 름도 그렇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절대 현실에서는
없었으면 하는 그런 불우한 이야기들. 불우를 넘어서서 경악스럽고 인상이 찌푸려지고
그냥 고개를 돌려버리게 만드는 경험들.
이제라도 뭐, 그런 그 두 사람이 만났으니 이제는 천하무적이리라.
힘내요 이 세상의 모든 트렁커들 -
여행용 가방이든, 세탁기든, 이불장이든, 빨래바구니든, 환기구든 아무도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들어가서 혼자만의 공간에 밀폐됨에 만족하고 안정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
정말, 나 역시도 책 마지막 장에 있는 작가의 말처럼, 자신이 과거에 겪은 나쁜 기억으로부터
자꾸 도망치기만하고 묻어두는 것만을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말고.
트라우마는 더 큰 트라우마와 정면승부함으로써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옳소 옳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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