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불안을 사랑하는 여자. 불안정과 모험이 어쩌면 자신의 삶의 숙명일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여자.
안정과 안위가 중요한 남자. 위험에 뛰어들 용기가 없는 남자. 그러면서 그런 여자를 사랑한 남자.
두 사람의 인생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만남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삶의 숙제를 해내야만 하는 니나에게 자신을 뒤흔드는 슈타인이 있어야했다. 그래야만 불안정한 자신의 삶(숙제)이 완성된다. 그래야만 이 세상에 부적응자같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니나 역시 누구보다 안정을 바란다. 그 누구보다 쉽게 흔들리는 자신인 것을 알기에 지탱할 무언가에 무던히도 목마름을 느낀다. 안타깝게도 슈타인은 이런 니나를 더욱 세차게 흔든다. 니나와 비슷한 면모가 많은 나로선 두말할 것도 없이 (니나와 마찬가지로) 슈타인에게 내 일부라도 맡길 수 없다.
그러나 가장 불쌍한 건 슈타인이다. 이 책은 슈타인이 니나에게 남기는 편지를 보여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니나의 친언니의 1인칭시점 소설이지만, 니나의 언니가 슈타인의 편지를 읽는 형식이기 때문에 슈타인의 1인칭시점의 책일 수도 있다. 그런 슈타인의 한스런 편지글을 읽고있자면 마음에 무거운 추를 달고 있는 기분이다. 니나는 차라리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그림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당당히 그 그림을 자신의 옆구리에 끼고 당차게 걸어나간다. 슈타인은 니나처럼 할 용기가 없다. 먼 발치에서, 때론 바로 한 걸음 뒤에서, 니나를 사랑한다. 니나의 삶의 방식이 그에겐 두렵다. 슈타인은 니나가 안쓰럽고 그녀에게 화가난다. 십수년의 니나와의 관계를 통해 그 안쓰러움과 분노는 자신을 향해있음을 알게된다. 항상 주저하고 안정만을 욕구하는 '바로 그 자신'이 니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세상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며 삶에 임하는 둘의 실존을 참 잘 그린 멋진 책이다.
내가 죽을 수밖에 없다면, 난 알고 싶어요. 죽음은 중요한 일이에요. 죽음을 단 한 번밖에 경험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의식 없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도살당하기 전에 머리를 몽둥이로 얻어맞는 동물처럼요? 나는 죽음 곁에 있고 싶어요. 이해하시겠어요? 44
온갖 아름다움이란 것이 일시적이고 다만 얼마 동안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 틈이나 나무와 극장과 신문 사이에 있으면서도 마치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나 다 우울하지. 65
아, 때때로 모든 것을 걸 만한 위험이 없는 삶이란 아무 가치가 없어. 66
언니도 알아?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전날과 아주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는 거야. 갑자기 다르게 걷고, 다른 글을 쓰고, 다르게 말을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자기 자신은 잘 알고 있지. 우리는 이렇게도 될 수 있고, 혹은 전혀 다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야.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고 자기 자신과 게임을 할 수 있어. 책을 읽으면서 책 속에 있는 이런저런 인물과 자기가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있잖아? 다른 책을 읽으면 또 다른 모습이 보이고, 끝없이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거야. 자기 자신의 내부를 들여답면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보여. 어느 것도 진정한 자아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수백 개의 자아를 다 합친 것이 진정한 자아인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미정이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사실은 이 여러 자아 가운데 하나의 자아만을, 미리 정해져 있는 특정한 하나의 자아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만. 77-78
나는 그 시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을까봐 두려웠다. 그것이 나쁜 시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나는 자문했다. 내 감정이 흔들릴까? 싸구려 미적 취미를 보여주는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 미적 취미가 형편없고 재능 또한 없는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ㅡ 119
… 행복이든 불행이든 결말이 나야 해. 마치 극장에서처럼 모든 것이 깨끗하게 결말이 나야 해.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기가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정작 인생에는 한 가지 계산서도 없고 아무런 결말도 없는데 말이야. 결혼도 결말이 아니고, 죽음도 겉보기만 그렇지 결말이 아니고. 생은 계속 흘러가는 거야. 모든 것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아무 논리도 없으며, 모든 것은 즉흥적으로 생성되고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서 한 조각을 끌어내서는, 현실에는 없고 삶의 복잡함에 비하면 우스울 뿐인 , 작고 깔끔한 설계에 따라 그것을 건축하고 있어. 모두가 꾸민 사진에 지나지 않아. 149-150
내 말은 우리는 조심스럽게 살아야 하고 어디서도 안전하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모든 피조물들이 그렇게 살지. 언니는 혹시 한 마리 새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고양이, 말똥가리, 담비, 어린 학생들, 겨울 추위, 이 모두가 그를 쫓고 있어. 새는 이런 한가운데에 살면서 새끼들을 키우고 있어. 한순간도 나뭇가지에서 마음놓고 앉아 있지 못하지. 그래, 새를 봐, 새가 어떻게 앉아 있는지를 봐. 달아날 준비를 하고, 경계를 하면서, 불안해하면서 나뭇가지에 앉아 있잖아. 그리고 온 세상이 그를 적으로 보는데 노래 부르는 거야. 154
나는 텅 빈 방과 천천히 죽어가는 수종증을 앓는 노파, 작은 가게, 그리고 파리들을 쳐다보았다. 여기에서 니나는 거의 일년을 보냈다. 왜인가?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서? 나의 도움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사실은 <생>이 그녀에게 부과한 모든 과제를 자신이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였다. 이런 망명지와 같은 곳에서 니나는 불행하지 않았을까? 아니, 하나의 난관을 극복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과연 불행할까? 169
나는 벌써 오래전에 단념해 버렸어. 노력은 했어. 그러나 항상 나를 내모는 어떤 것이 있었어. 이를테면 밤중에 꼭 써서 처리해야만 하는 긴급한 원고 같은 것. 항상 일이 앞에 있어서 언제 거기서 놓여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어떤 완전한 것은 이룰 수 없으리라는 느낌, 시작만 하고 만다는 느낌뿐이었어. 마치 담벼락을 올라가려다가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개처럼, 발톱이 상하고 앞발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계속해서 시도하는 개처럼, 그 불쌍한 개처럼 말이야. 그리고 의식에서는 항상 다음과 같은 말이 맴도는 거야. 네가 하는 일은 충분하지 못해, 너는 해야만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을 거야. 그리고 또 이룬 것에 대한 불만도 있어. 이룬 것을 손 안에 쥐고 조금이라도 기뻐하려고 하면 그 순간 그것은 분해되어서 사라지고 마는 거야. 미심쩍고 헛된 것에 대해 기뻐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미 나를 괴롭히는 새로운 착상이 와 있기 때문이야. 수백 가지의 조그마한 불안들. 아이들이 기침을
한다. 아니면 한 아이가 거짓말을 했을 때 이 아이가 나쁜 성격을 갖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 이 모든 것들이 없을 때면 뒤에서 커다란 악령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 가령 너무 많은 책들 때문에 질식해 죽을 것 같은 느낌, 혹은 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너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질식당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모든 아름다운 것이 사라진다는 것,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이런 것에 대한 슬픔. 완전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망. 철저하게 순수한 절망도 없으며 값싼 혼합물, 값싼 혼합물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 인간은 행복할 수 없으며, 행복을 단념해도 평안에 이르지 못한다는 생각. 그래, 언니. 이 모든 것이 떠나지 않고 항상 내 뒤에 있는 거야. 완전한 삶을 느낄 때도 이런 생각은 어김없이 떠올라 나에게 속삭이는 거야. … 나를 이렇게 내모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자문해 보아도 모르겠는 거야. 그리고 그건 바로 너 자신이야, 라고 대답하면 그것은 말일 뿐 아무것도
아닌 거야.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하는 거야. 그럴 것이, 나 자신은 오로지 행복을 원하며 행복에서 쫓겨나는 것은 원하지 않으니까. 마찬가지로, 이것은 너의 운명이야, 라고 대답하면 역시 말일 뿐 아무것도 아닌 거야.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하는 거야. 그럴 것이, 이 운명은 누가 만드는데? 나 자신이잖아. 그러면 왜? 이렇게 의문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계속되는 거야. 나를 지혜롭게 만들기 위해 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닐까, 라고 말하면 또 물어볼 수밖에. 내가 행복 속에 잘살고 있다면 지혜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요? 지혜는 행복이나 선함보다 나은 건가요?
니나는 나에게 절망적인 시선을 던졌다. 내가 이 질문의 답을 꼭 알고 있어야만 된다는 듯이.
그리고 인간은 왜 고통을 통해서만 지혜에 도달할 수 있는 거야? 니나는 나지막이 말을 계속했다. 소리는 작았지만 완강한 어투였다. 그리고 전혀 원하지 않는데도 왜 현명해져야 하는 거야? 207-209
이런 여러 정신적 자세를 얻기까지 니나는 어떤 대가를 치렀을까? 이제 나는 니나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토록 강력한 힘과 용기를 요구한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255
당신은 사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만큼 잘 알고 있어요. 우리는 생의 의미를 알려고 했어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죠. 만약 의미를 묻게 되면 그 의미는 결코 체험할 수 없게 돼요. 의미에 대해 묻지 않는 자만이 그 의미가 뭔지 알아요. 319-320
나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해요. 그러나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삶을 비켜갔어요. 한번도 모험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도 못했고 잃지도 않았어요.
니나는 정말 흥분했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그렇지 않아요. 행복이 무엇인지 당신은 전혀 몰라요. 그러나 나는 행복해요. 나는 당신이 나의 인생을 당신 인생처럼 만들려고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요. 당신의 인생은 마치 일요일을 망쳐버리는 재미없고 어려운 학교 숙제 같아요. 얼마든지 나를 부박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마 삶에 대한 당신의 불안이 삶을 사랑하는 내 방식보다 더 부박할지 몰라요.
나도 이제 화가 났다.
아, 그 인생, 인생. 나는 소리쳤다. 그게 도대체 뭐요?! 모든 인생이 인간적 삶은 아닌 거요. 당신은 오직 인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열광해서, 선택도 않고 그 앞에 서 있는 거요. 한번은 이 남자 팔에, 한번은 저 남자 팔에 안겨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