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손을 떼지 삶을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믿는다). 한 때 수입의 1/3을 책 사는 데 쓰고, 비행기로 박스 째 책을 실어 나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오랫동안 책에 치여 살았다. 서가는 물론, 옷장과 수납장 구석구석을 책으로 채우며 뿌듯해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회적 디딤돌 없이 살면서 물질로서의 책이 거추장스러워졌다. "많이" 쟁여 둘 게 아니라 한 권을 읽더라도 뼈와 피 삼는 게 중요하겠다 싶었다. 가벼워지고 싶었다. 한 밤 숲 속에서 흰 빵 흘리는 헨젤처럼 야금야금 책을 버리기 시작했다. 코로나 이후 3000권 넘게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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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가 길다. 책을 거의 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내용을 기억하기 어려운 전문서적만 주로 집으로 모신다. 800번대 책을 사는 일은, 1년에 1권? 책 덕후치고는 야박하다. 그런 내가 어젯 밤 서점에 다녀왔다. 이미 두 번이나 읽었는데도 [순례주택] 을 갑자기 소장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이 소설은 전체를 놓고 보아도,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따로 보아도 좋다. 작가의 인생관과 지혜를 그득 담아 놓았다. 게다가 그것은 나의 지향과 상당히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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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주택]의 주요 캐릭터 순례 할머니는 "순례(巡禮)"로 개명했다. 이름처럼 무소유와 홀가분함을 지향한다. 17억 빌딩 주인이면서 시세보다 훨씬 월세를 싸게 받고, 통잔 잔액이 1000만원 넘지 않게 관리한다. 세신사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산 집이라서 "때탑"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런 순례씨가 20년을 남친 삼았던 할아버지의 친 딸은 "원더 그랜디움 Wonder Grandium"아파트에 산다. 엄밀히 말하면 딸과 사위가 제 아버지의 집을 뺏다시피 무단점거한 것이다. 딸은 아버지 재산을 행여라도 빼앗길까 순례씨와 아버지의 결혼을 결사반대하고 순례씨를 '동거녀'라며 폄하한다. 한술 더떠서 순례씨가 사는 '빌라촌' 주민을 길고양이 취급했다. 딸의 남편도 만만치 않은 속물이어서,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데 장인어른과 4명의 누이의 지원금으로 살았다. 그 돈으로 대학을 마쳤는데 이후로도 도움만 기대한다. 염치도 없다. 그들은 고층 아파트 "Wonder Grandium"처럼 고층의 삶을 지향할 뿐, 땅에 발 딛게 될 경우 두발로 서지도 못할 인간형이다. 큰 딸 '오미림'도 그런 엄마아빠를 닮아서 "드라이클리닝 냄새 가시지 않은 잘 다려진 옷을 입고 BMW mini타고 출근하는 미래를 꿈꾼다. 공부는 잘해서 전교 1-2등 권이다. 반면 동생 오수림은 반에서 12-13등 짜리라고 제 엄마아빠에게서 "모지리" 취급 당하지만 [순례주택]에서 가장 당차고 똘똘한 캐릭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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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림이 엄마아빠처럼 '상대적으로' 조금 더 학교를 다녔고 '상대적으로' 조금 더 좋은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로 정직하게 사는 선량한 사람을 멸시하는 속물. "나" 화법만 쓰지 "너"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 적 없는 젠체들, 교육 받은 예의범절로 저열함을 감춘 사람을 나는 싫어한다(내가 그럴까봐 두려운 마음도 있다). 대신 사람 내면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초감각과 제3의 눈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대한민국 공교육을 통해서 잘 길러지기 어려울 감각이다. 그런데 [순례주택]의 중학생, "오수림"은 그런 제3의 눈을 가졌다. 수림이는 아마도 유은실 작가가 본인의 할머니를 본따서 입체감을 더했을 캐릭터일 터인데 "생활지능"이 높고 삶을 독립적으로 살 힘을 지녔다. 즉,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이 되어가는' 존재이다. 나이만 40~50살이지 아직도 덜자란 '덜어른' 수림이 엄마아빠와는 달리...
유은실 작가는 어떻게 이런 재미난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그 분의 인생경험과 인생 롤모델은 과연 무엇이길래 이런 작품을 썼을까? 너무 재밌어서....어쩌지. 3번 읽고나니 이제 유은실 작가에게 팬레터를 쓰고 싶어진다. 본격적인 [순례주택] 리뷰를 다음 번으로 미루고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