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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ven님의 서재
  • 호경
  • 이인현
  • 16,200원 (10%↓900)
  • 2026-09-09
  • : 2,325

2014년부터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며 타인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관찰하는 태도를 익힌 이인현 작가는 2018년부터 몸으로 마주한 현실을 텍스트로 담아내는 시도를 지속했다. <진동하는 것들>, <숨은 신>, <애도하는 귀>, <이 이야기는 너야> 등의 공저를 통해 기억과 자아의 관계성을 탐구해 온 작가의 고유한 시선은 신간 에세이 <호경>(히스테리안 출판)에서 한층 더 선명해진다. 이 책은 2017년 뇌출혈 이후 2020년 초기 혈관성 치매 진단을 받은 58세 '호경'을 다큐멘터리 감독의 시선으로 좇아가는 기록물이다. 이 책은 치매 당사자의 의학 보고서도 아니며,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가족의 수기도 아니다. 가족이나 전담 돌봄 노동자의 시선이 아닌 제3의 관찰자가 치매인의 파편화된 기억을 직조해 나가는 과정이 지니는 의미에 주목한다. 기억 상실이라는 취약함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고민하는 독자, 질병 서사와 돌봄의 새로운 관계 맺기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적극 권하고 싶다.


낯선 관찰자가 기록한 기억의 재구성

치매를 다룬 기존의 많은 텍스트가 질병을 앓는 당사자의 혼란이나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가족, 돌봄자의 고충에 집중했다면 이 책은 전혀 다른 궤도를 그린다. 치매안심센터에서 안내 봉사를 하던 작가는 믹스커피를 좋아하고 항상 잔잔한 미소를 띠는 인물 '호경'을 만난다. 돌봄의 의무가 없는 타인의 위치에서 작가는 호경의 사라져 가는 기억을 애써 교정하려 하거나 질병의 비극성을 과장하지 않는다. 그저 테이블에 마주 앉아 호경이 자주 쓰는 "똑같아요"라는 말의 여백을 가만히 응시하고 컵이 남긴 물 자국을 바라볼 뿐이다. 나아가 작가는 출퇴근길 지하철 환승 통로를 걸으며 뇌과학 서적 <오작동하는 뇌>를 읽고, 기억과 기억 사이에 놓인 통로가 피나 단백질로 가로막히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탐구하며 치매인의 상태를 편견 없이 이해하려 노력한다.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문장처럼 과거를 인식하는 일은 원래 어떠했는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 일이다. 작가는 호경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지는 과거의 파편들을 주워 모으며 한 인간이 지나온 생의 윤곽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간다. 이러한 접근은 대상화의 위험을 피하면서도 인물의 내면에 다가가는 다큐멘터리 창작자 특유의 섬세한 방법론을 엿보게 한다.


지워진 시간 속에서 인간의 고유성을 찾다

전체 치매 발병 원인의 20~30% 정도를 차지하는 혈관성 치매는 호경의 화려했던 과거를 채도가 사라진 회색의 시간으로 탈색해 버렸다. 일본에서 대학교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했던 호경은 정작 자신이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명확히 떠올리지 못한다. 작가는 노트북을 펼쳐 구글 맵을 실행하고 도쿄 지하철 노선을 따라 게이오타마센터, 나가야마, 세타가야 등 낯선 지명들을 짚어가며 호경의 잃어버린 경로를 함께 추적한다. 비록 지도 위에서 학교를 찾는 일은 실패로 돌아가지만 이 과정 자체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호경이 빨간색 형광펜으로 테두리를 그리고, 정성껏 적어 내려간 일본어 시 <추억의 길>과 <내가 좋아하는 바다!>는 그의 내면을 투명하게 비춘다. 아침의 고요함(아사나기)과 저녁의 잔잔함(유우나기)을 언급하며 바다에 취하고 싶다는 낭만적인 시구, 눈 내리는 길을 혼자 걷는 차가움을 묘사한 문장들은 치매라는 거대한 이름표 뒤에 가려진 그의 생생한 감각을 증명한다. 내용보다 존재 자체가 절대적인 비밀이라는 어린 시절의 일기장 꾸러미, 전라남도 승주군 냇가를 건너며 울었던 최초의 흩어진 기억 그리고 1992년 여름 에노시마역 플랫폼 벤치에 앉아 있던 사진 한 장은 소멸해 가는 개인의 고유성을 지켜내려는 애틋한 연대의 흔적이다.


질병을 넘어선 연대와 상호 작용의 가능성

행복이 무엇이냐는 작가의 질문에 호경은 걱정이 없으면 행복한 것 같다고 덤덤하게 답한다. 집 계약 기간이 끝나는 것과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걱정을 토로하는 작가 앞에서 질병과 기억 상실이라는 거대한 상실을 마주한 호경의 평온한 태도는 진중한 사유의 계기를 제공한다. 기억을 상실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온 가족에게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동반한다. 허나 작가는 이 두려움의 한가운데에 선 치매인 호경을 그저 보호받아야 할 취약한 환자로만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동등한 대화 상대로 대우하며 미세한 표정 변화와 농담까지도 활자화한다. 매일 새벽 4시마다 출근길에 문자를 건네는 친구 안과 아침 8시경 어김없이 답장을 보내는 호경의 교류는 질병 속에서도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호경이 하는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끝까지 들어주는 작가의 다정한 태도는 우리가 취약해진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혈연이나 제도의 굴레를 벗어난 사려 넘치는 관찰과 대화가 어떻게 한 사람의 부서진 세계를 껴안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 텍스트는 덮고 난 후에도 여운을 남긴다.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억의 문학

문학평론가 최가은은 책 말미의 해제 <비밀과 답장: 기억-하기>를 통해 이 책이 지닌 층위를 정밀하게 짚어낸다. 평론가는 작가가 호경의 기억을 좇는 과정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과 교차하며 팩트와 픽션이 기묘하게 얽히는 지점을 포착한다. 에노시마 여행 사진에서 출발해 오키나와 육군병원 하에바루 갱도 제20호 천장에 새겨진 한국인 성씨 '강'을 마주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사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뒤섞인 이 가상의 오키나와 여행은 개인의 파편화된 기억이 어떻게 잊힌 역사와 장소의 상실로 가닿는지를 보여준다. 최가은 평론가의 지적처럼 이 책에서 기억은 봉인된 편지 속에 고여 있는 사적 소유물이 아니다. 산산조각 난 편지의 잔해를 주워 모아 기꺼이 답장을 쓰기로 마음먹는 아이의 모습은 타인의 미약한 삶에 응답하려는 작가의 굳건한 태도와 포개어진다.


약한 고리를 자처한 만남과 질병 언어의 재정의

작가 이인현이 호경을 처음 마주한 것은 2025년 봄, 노원구에서 진행된 초기 치매 인식 개선 프로젝트 <광고 안 리모컨 with 노원>을 통해서였다. 5개월 남짓한 공식 활동이 종료된 후에도 작가는 1년 이상 만남을 지속하며 호경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걸어 들어간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듯, 과거 세월호 참사 현장을 겪으며 무거운 마음에 다큐멘터리 작업을 그만두어야 했던 창작자에게 타인의 텅 빈 공백을 기록하는 행위는 남다른 고뇌를 동반했다. 그럼에도 그는 삶을 그저 받아쓰는 관찰자를 넘어 특정 조건에 처한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직조해 나가는 '약한 고리'가 되기를 자처한다. 이어지는 <치매의 언어> 챕터는 질병을 대하는 저자의 올곧은 태도를 방증한다. 어리석다는 뜻을 내포한 한자어 치매(癡呆)나 마음이 박탈된다는 라틴어 어원 대신, 인지 저하 상태에서도 끝내 자아를 지키려 분투하는 환자의 주체성을 역설한다. 이 시선은 문화인류학 연구자 안희제의 추천사처럼 사진과 편지, 대화라는 불완전한 조각들로 서로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는 다정하고 적극적인 교감으로 이어진다. 오키디스트 스튜디오가 작업한 채도 높은 와인색 표지 하단에 호경의 실제 삐뚤어진 손 글씨를 고스란히 배치한 디자인 역시, '치매'라는 병명 뒤에 가려진 한 인간의 생동하는 존재감을 증명하려는 세심한 장치다.


상실의 시대에 띄우는 연결과 응답의 글쓰기

망각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한 인간의 존엄은 어떻게 보존될 수 있는가. 히스테리안 신간 <호경>은 이 까다로운 질문에 대한 성실한 응답이다. 호경은 외국어가 모국어보다 편해진 낯선 감각 속에서 한국 생활을 이어가지만, 그 혼란스러운 궤적조차 그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조각이 된다. 누군가의 잃어버린 생애를 온전한 형태로 복원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과업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워진 공백을 함부로 채워 넣지 않고 미완의 상태 그대로를 존중하며 함께 기억의 언저리를 서성이는 글쓰기 행위는 타인과 새롭게 연결되는 탁월한 매개체가 된다. 가족과 전담 의료진의 시야 바깥에서 섣부른 동정을 거둔 채, 타인의 목소리에 끝까지 귀 기울이는 관찰자의 존재는 우리 사회의 돌봄 담론을 한 차원 더 넓고 자유로운 곳으로 이끈다. 이 특별한 기록물은 단절의 징후 속에서도 인간이 서로를 향해 묵묵히 손을 뻗고 답장을 써 내려갈 수 있다는 연대의 가능성을 분명히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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