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향기 출판사의 '언제라도 여행 시리즈' 두 번째 에세이 <언제라도 동해>는 단순한 명소 가이드북을 뛰어넘는 진정한 로컬 라이프의 기록이다. 90여 개국을 누빈 1세대 여행작가 채지형은 <지구별 워커홀릭>, <여행의 힘>, <여행이 떠나도 사랑은 남는다> 등을 통해 자신만의 여행 철학을 구축해 온 인물이다. 세계 곳곳을 누비던 그가 국내의 작은 항구마을에 마음을 빼앗긴 사연은 묘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최근 2025년 12월 갤러리 바란에서 사진작가 조성중과 함께 동명의 감성 사진전을 개최하며 강원도 동해시를 향한 남다른 애정을 증명한 저자는, 이 책에서 든든한 동반자 남편 브루스와 묵호에 여행책방 '잔잔하게'를 열고 정착한 3년의 궤적을 촘촘히 풀어낸다. 팍팍한 일상에 쉼표가 필요한 현대인과 지역 창작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 에세이가 훌륭한 가이드 역할을 할 것이다.
낯선 정박지가 다정한 일상이 되기까지..
책의 목차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이방인이 어떻게 지역 공동체의 일원으로 녹아드는지 엿볼 수 있다. 서두에서 밝히듯, 저자는 2020년 봄 발한도서관 강의 차 묵호에 들렀다가 '동해 한 달 살기'를 결심하고 결국 삶의 터전을 통째로 옮기게 된다. 프롤로그에는 "그림 같은 집을 지어 제2의 인생을 계획한 것도, 지역 생태계를 위한 로컬 라이프를 꿈꾸며 내려온 것도 아니었다. 일 때문에 왔다가, 친절한 이들 덕분에 좀 더 머물렀다"라는 솔직한 고백이 담겨 있다. 억지로 꾸며낸 거창한 귀촌 서사가 아니라 우연이 필연으로 스며드는 과정을 담담히 그렸기에 설득력이 돋보인다. 서울신문 박상준 여행작가의 언론 기사에 인용된 "여행이란 결국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책 속 문구처럼, 채지형 작가에게 묵호는 끝없이 내면을 대면하는 맑은 거울 같은 장소다.
동해 한 달 살기의 진정한 의미와 궤도의 변화
당초 9월에 시작했던 저자의 동해 한 달 살기는 연장을 거듭해 12월까지 이어졌다. 온전히 30일을 묵호에 머물며 코로나 시기의 답답함을 파도 소리로 달래던 이 시간은, 단순한 장기 여행을 넘어 삶의 우선순위를 재편하는 계기가 된다. 책 속에는 어머니의 네 번째 다리 수술로 인해 두 달간 병원에서 합숙 간호를 해야 했던 애틋한 사연이 등장한다. 간호를 마치고 서울 마곡동 집으로 돌아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면서도, 저자는 성난 파도가 달려들던 동해의 거세고 푸른 바다를 그리워한다. 동해 한 달 살기가 일시적인 도피처가 아니라, 도시의 매끈한 일상보다 거칠지만 펄떡이는 자연의 호흡이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충만하게 채우는지 증명한다.
묵호항에서 논골담길까지.. 책으로 걷는 명소들
책 곳곳에 등장하는 손수 그린 아기자기한 지도는 텍스트를 읽는 묘미를 배가한다. 논골담길, 바람의 언덕, 묵호등대 같은 전통적인 랜드마크는 물론이고, 도째비골 스카이밸리 등 최근 떠오르는 문화 공간까지 저자의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된다. 대우칼국수와 오뚜기칼국수의 양대 장칼국수를 비교하거나 동쪽 바다 중앙시장의 활력을 묘사한 대목에서는 미각과 후각이 동시에 자극받는다. 여기에 더해 발한삼거리 주변의 소박한 핫플 탐방기는 쏠쏠한 재미를 선사한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부부가 운영하는 소품 가게 '묘한', 흑임자 커피와 퀸아망이 일품인 '라운드어바웃', 그리고 해당화 차를 내어주는 '연필뮤지엄' 4층 카페는 뚜벅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답답할 때면 곧장 달려간다는 추암해변의 늠름한 촛대바위와 72미터 길이의 출렁다리 풍광은 텍스트만으로도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책방 '잔잔하게'가 쏘아 올린 연대의 가치
2부의 중심 배경이 되는 동네 서점 창업기는 본 작품의 가장 눈부신 매력 포인트다. 대도시에서도 살아남기 힘든 종이책 방을 인구 감소를 걱정하는 바닷가 마을에 열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신선한 모험이다. '묵호책방'이나 '문어책방' 같은 뻔한 이름 대신, "꽃이 참 잔잔해서 예쁘다"라고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에서 영감을 얻어 '잔잔하게'라는 서정적인 간판을 달게 된 일화는 다정다감하다. 매주 화요일 책방 문을 닫는 날이면 부부는 도연명의 산문에서 유래한 무릉계곡 베틀바위로 향한다. 방전된 에너지를 숲의 정기로 채우며 일과 휴식의 절묘한 균형을 맞춰가는 이들의 일상은 진정한 로컬 라이프의 본보기를 제시한다. 소설가 김연수 작가와 함께한 한여름 밤의 낭독회 풍경은 이 비좁은 공간이 어떻게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아름다운 책방이 아름다운 도시를 만든다는 증명
동해에서 여행책방을 운영한다는 것은 단순한 상업적 행위를 넘어선다. 저자는 출판평론가 한미화의 저서 <유럽 책방 문화 탐구>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책방이 아름다운 도시를 만든다"라는 문장을 인용하며 동네 서점의 가치를 역설한다. 과거 묵호에는 속초나 강릉과 달리 이렇다 할 작은 서점이 부재했다. 문화적 인프라가 부족했던 바닷가 마을에 자리 잡은 서점은 일종의 복지 시설이자 마을을 지탱하는 공공장소로 기능한다. 책과 사람이 만나고 서로의 취향을 나누며 연대하는 이 공간은 지역 주민과 여행자 모두에게 지적 갈증을 해소해 주는 소중한 문화적 구심점이 되었다.
여명과 산불, 경이롭고도 두려운 자연의 양면성
<언제라도 동해>는 바닷가 마을의 낭만만을 소비하지 않는다. 이웃 주민들과 함께 여명이 떠오를 무렵 너른 데크에 매트를 펴고 수리야 나마스카라 일출 요가를 수행하는 장면은 태국 빠이의 히피 마을을 연상케 할 만큼 자유롭다. 반면, 울진에서 시작된 산불이 동해안을 덮치고 소방차보다 빠른 '양간지풍'이 진군하는 병사처럼 골목을 점령했던 봄날의 묘사는 아찔하다. 논골담길의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불이 번지지 않게 물을 퍼부어야 했던 긴박한 순간은 대자연의 경이로움 이면에 도사린 매서운 위협을 고스란히 전달하며 동해살이의 고단한 이면을 비춘다.
오늘도 여행하듯 산다는 것, 일상 탐험의 묘미
에필로그에 묘사된 저자 부부의 일상은 동해살이의 정수를 보여준다.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남편 브루스와 함께 걷는 시간은 숨 막히는 서울의 지하철 출퇴근길과 확연히 대비된다. 이들은 맑은 공기를 마시며 매일 걷는 이 시간을 '탐험'이라 부른다. 반듯한 도로 대신 골목마다 다른 표정을 지닌 묵호의 미로 같은 길을 걸으며, 익숙함 속에서 생소함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린다. 가볍게 대진까지 걷거나 논골담길로 내려오고, 체력이 허락하면 사문재를 넘어 어달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오늘도 여행하듯, 동해에 삽니다"라는 저자의 진솔한 고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음의 속도로 걷고 싶은 이들에게 전하는 위로
책의 뒤표지에 새겨진 "마음의 속도로 해변을 걷고 싶은 이들에게"라는 문구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다. 치열한 속도전이 벌어지는 도심을 벗어나 자신만의 보폭으로 걷고 싶은 사람들에게 묵호는 최적의 성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는 시간은 현대인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휴식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를 곁에 두고 느리게 걷다 보면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풀린다.
고단한 영혼을 위한 안식처, 언제라도 동해
책의 제목이 왜 하필 '언제라도 동해'인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일 년 365일 어느 때 방문해도 각기 다른 빛깔로 여행자를 품어주는 바다의 포용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치열한 일과를 버텨내다가 언제라도 마음 한구석을 기댈 수 있는 정신적 안식처가 그곳에 있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에서 여행 글쓰기를 가르치며 '책을 쓴다는 것은 통과의례'라고 설파하던 저자는, 플라톤 아카데미가 주관한 홍천의 '1박 2일 북캠프'에 참가해 자발적으로 독서를 위한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세상을 떠돌며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좁은 방 안에서 침묵하며 책에 집중하는 시간과 묵호 앞바다를 멍하니 응시하는 시간은 모두 영혼을 치유하는 동일한 의식이다.
왜 지금, 당장 동해로 떠나야 하는가?
마지막 4부 '동해를 여행하는 10가지 방법'은 에세이 특유의 감성을 유지하면서도 실용적인 정보 측면을 온전히 채워준다. 해파랑길 33코스를 걷거나 추암에서 어달해변으로 이어지는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묵호가 품은 다채로운 푸른빛에 무장해제된다. 저자가 강조하듯 동해는 오일장의 푸근함과 대형마트의 편리함이 공존하고, 세련됨과 소박함이 균형을 이루는 흔치 않은 도시다. 쉼 없이 팽창하는 수도권 경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이곳은 자신의 속도대로 넉넉히 숨 쉴 수 있는 해방구다. 언제라도 기차에 올라타 묵호역에 내리면.. 두 팔 벌려 환영해 줄 것 같은 사람의 온기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진동한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누구라도 당장 스마트폰을 열어 KTX 승차권을 예매하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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