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 교수는 서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동 대학 학부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학자이자, 2007년 문학사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한 이후 연구자와 평론가의 길을 함께 걷고 있다. 십여 년간 신문 지면을 통해 칼럼을 연재하며 대중과 문학의 거리를 좁혀온 저자는, 그동안 <책 읽고 글쓰기>, <국어 잘하는 아이가 이깁니다> 등의 저서를 통해 유려하고 다정한 문체를 선보여 왔다.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북다 신간 <오래 곁에 두어 좋은 말>은 한국 문학 100년의 역사 속에서 길어 올린 142개의 단어를 매개로 삶의 결을 어루만진다. 자극적인 매체에 지쳐 모국어의 고운 결을 되찾고 내면을 다독이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이 단상집은 활자 그대로의 잔잔한 위로를 건네는 책이다.
100년의 문학에서 발굴한 언어의 지층
저자는 하루에 하나의 단어를 쥐고 산책하듯 사유의 길을 걷는다. 책 속에 담긴 백마흔두 개의 낱말은 곧 백마흔두 개의 인생과 조응한다. 단순한 사전적 정의의 나열이 아니라.. 시와 소설 속에서 살아 숨 쉬던 어휘들을 현실의 맥락으로 호출하여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한다. 빛바랜 문학 작품 속에 화석처럼 굳어 있던 우리말은 저자의 세밀한 관찰력을 거쳐 현재의 기쁨과 슬픔을 대변하는 도구로 격상된다. 이는 언어가 단지 소통의 수단을 넘어, 한 사람의 내면을 구성하고 세계를 인식하는 창틀임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일상의 온도를 바꾸는 단어의 마력
수록된 단어들은 저마다 고유한 체온을 지닌다. 일상의 소박한 풍경을 단어와 연결하는 솜씨는 탁월하다.
'말쑥하다' 편에서는 스물다섯의 화자와 스물아홉 남편 최성우가 처음 인사하러 온 날, 양말 밖으로 삐져나온 엄지발가락을 회상하며 이를 삶의 명화로 승화시킨다. 길고양이 오레오를 만지며 혹여 엄마가 슬퍼할까 봐 할퀴는 것을 걱정하는 어린아이의 까만 눈동자에서는 '무구하다'의 참뜻을 찾아낸다. 또한 김혜린의 만화 <불의 검>을 경유하여 쇳덩이를 수천 번 내리쳐 강철을 만드는 '벼리다'의 과정에 담긴 땀과 시간을 반추하고, 윤동주의 시 <산울림>을 빌려 언젠가 아들과 함께 메아리를 들으러 가고 싶다는 소망을 꺼내놓는다.
뜻밖의 횡재가 얼굴을 범람할 때 피어나는 '희색', 가슴 한구석을 저릿하게 만드는 '아리다'의 감각, 나이가 들며 비로소 갖추게 되는 적당한 거리감인 '데면데면하다'의 미학까지.. 저자의 글은 보편적인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고 길어 올린다.
상처를 껴안고 삶을 조각하는 태도
저자는 삶의 유한함과 쓸쓸함 앞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는다. 몸을 둥글게 말고 추위와 외로움을 견디는 '웅숭그리다'의 모양새를 살피며, 내면의 슬픈 덩어리를 온전히 끌어안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다독인다. 필립 아리에스의 저서 <죽음 앞의 인간>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아로새기다' 편에서는 추모 공원 비석에 남겨진 짤막한 묘비명을 통해 단단한 돌 위에 각인된 사랑의 의지를 읽어낸다. 누군가의 이마를 짚어주는 손바닥의 온기를 묘사한 '다사롭다'의 대목은 타인을 향한 연민을 자신만의 글로 다독인다.
곁에 두고 오래 음미해야 할 단어의 숲
북다 신간 <오래 곁에 두어 좋은 말>이 지닌 돋보이는 점은 독자에게 읽기의 속도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페이지부터 순서대로 읽어 내려갈 필요 없이, 그날의 기분과 날씨에 맞춰 마음이 끌리는 단어를 찾아 펼치면 그만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고른 어휘도 신중하지만, 덧붙인 단상들이 읽기 아까울 정도로 어여뻐서 이 책을 편든다고 찬사를 보낸 이유를 단숨에 짐작하게 한다. 자극적이고 휘발성이 강한 텍스트가 범람하는 시대에 이 단상집은 머리맡에 두고 천천히 소화해야 할 정신적 자양분이다.
빈칸으로 남겨진 나만의 언어, 그 여백의 의미
마지막 장에 다다르면 인쇄된 문장이 없는, 빈 괄호와 밑줄만 덩그러니 놓인 '나의 단어' 페이지를 마주한다. 작가가 선별한 백마흔두 개의 어휘를 징검다리 삼아 건너온 이들에게, 이제 스스로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은 고유한 낱말을 건져 올려 보라고 권유하는 은밀한 초대장이다. 누군가가 미리 정의해 둔 뜻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자의 삶 속에서 체화된 기억과 감정을 언어로 지어낼 때 비로소 독서는 완성된다. 텅 빈 여백에 펜을 들어 나만의 단어를 적어 내려가는 행위는 흩어지는 상념을 붙잡아 내면의 윤곽을 선명하게 다듬는 진중한 의식이다. 이 작은 기록의 실천이야말로 저자가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던 진정한 의미의 모국어 한글 사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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