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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ven님의 서재
  • 나의 통역사
  • 리 랑그바드
  • 16,200원 (10%900)
  • 2026-06-16
  • : 1,450

리 랑그바드는 1980년 한국에서 태어나 생후 2개월에 덴마크로 입양된 작가이자 번역가로 디아스포라의 정체성과 초국가적 입양 시스템의 이면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다. 2006년 시집 <덴마크인 홀게르 씨를 찾아라>로 덴마크 문학상 보딜-외르겐 몽크 크리스텐센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이래, <그 여자는 화가 난다> 등의 저서를 통해 입양 커뮤니티 안팎에서 활발한 비판적 목소리를 내어왔다. 또한 김혜순의 시집 <죽음의 자서전>을 덴마크어로 공공 번역하는 등 문학적 가교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신간 <나의 통역사>는 2024년 덴마크 몬타나 문학상과 프리즈마 문학상을 휩쓸며 북유럽 최고의 문학으로 인정받았다. 이 책은 한국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는 저자와 그의 연인이자 한국계 덴마크인 통역사가 함께 한국의 친가족을 만나며 겪는 언어적 단절과 정서적 교감을 희곡 형식으로 담아낸 독창적인 책이다. 입양인이 겪는 근원적인 소외감과 핏줄로 얽힌 가족 간의 복잡한 미로를 통역이라는 렌즈를 통해 그려낸다.


희곡의 무대 위에 올려진 기호와 디아스포라의 언어

책의 원제인 'TOLK'는 덴마크어로 통역사를 뜻하지만, 그 활자의 생김새는 묘하게도 한글의 자음과 모음(ㅜ, ㅇ, ㄴ, ㅈ)을 연상시킨다. 덴마크 독자들에게는 명료한 의미의 단어지만, 한글을 아는 이들의 눈에는 파편화되어 해독할 수 없는 기호처럼 다가온다. 표지에서부터 시작된 시각적 은유는 모국어를 잃어버린 작가의 처지를 고스란히 체현한다. 반면 한국어판 제목인 <나의 통역사>는 이 건조한 원제에 '나의'라는 소유격을 더했다. 이는 통역사가 단순한 언어 변환기를 넘어, 단절된 두 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생명줄이자 가장 내밀한 연인이라는 절대적인 의존성을 부각한다. 원제가 객관적인 언어의 장벽을 보여준다면, 한국어 제목은 그 장벽을 넘고자 하는 주관적인 애착을 드러내는 셈이다. 일반적인 에세이나 소설의 서술 방식을 탈피하여 작가는 자신과 통역사, 그리고 친가족들의 대화를 대본처럼 나열한다. "나는 말한다", "내 통역사가 말한다", "큰언니가 말한다"로 이어지는 건조한 문장들은 독자를 관찰자, 옵저버?의 위치로 끌어당긴다. 언어를 잃어버린 화자의 말이 한국어로 적혀 있다는 모순은 역설적으로 그가 감내해야 했던 문화적, 역사적 상실의 크기를 시각화한다.


서울의 삼계탕집, 통역을 경유하는 감정의 온도

책에 담긴 시간과 공간의 궤적은 이들의 여정이 지닌 팍팍함을 보여준다. 2018년 서울의 어느 삼계탕집에서 시작된 만남은 피자헛, 엔제리너스, 스타벅스, 호텔방 등 일상적이고 현대적인 공간들을 부유한다. 혈연이라는 강렬한 끌림으로 마주 앉았지만, 이들 사이에는 통역 없이는 건널 수 없는 거대한 심연이 존재한다. 식당 종업원의 안내를 받고 낮은 상 앞에 자리를 잡은 낯선 풍경 속에서 친어머니와 큰언니를 마주한 작가의 내면은 복잡하게 요동친다. 삼계탕을 먹었냐는 언니의 물음에 통역사를 거쳐 대답이 오가고, 출장 중이라 오지 못했다는 아버지의 부재를 두고 어머니가 거짓말하시는 것 같다고 의심하는 대목은 피붙이라는 환상을 걷어낸 리얼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 서술은 감상주의에 기대지 않고 오히려 언어의 지연을 통해 가족 간에 흐르는 미세한 긴장과 서툰 애정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발화되지 못한 비밀과 고백이 된 텍스트

대화의 이면에는 번역을 거치지 못한 숱한 말과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아 있다. 작가는 끝없는 망설임 속에서 차마 한국의 혈육들에게 전하지 못한 비밀을 품고 겉돈다. 연인이자 소통의 매개인 통역사와의 관계가 두드러진다. 둘째 언니와의 묘한 기류 속에서 통역사는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싫다면 먼저 레즈비언이라고 솔직하게 말해보는 것은 어떠냐며 고백을 제안한다. 허나 화자는 섣불리 진실을 꺼내지 못한 채 언니들이 그 이야기를 남편에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문장들을 속으로 삼켜버린다. 비록 가족들이 넌지시 이들의 특별한 유대를 눈치챘을지언정, 마주 앉은 식탁 위에서 성 정체성은 끝내 직접적으로 발화되지 않는다.


흥미로운 지점은 <나의 통역사>가 출간됨으로써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내밀한 관계가 만천하에 드러난다는 역설이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떠나야 했던 모국, 디아스포라의 세계에서 자신의 고유한 성향과 연인의 존재가 낱낱이 노출되는 것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이 문장 사이사이에 짙게 배어 있다. 발화되지 못한 채 삼켜진 비밀들은 활자화되는 순간 폭발력을 지닌 강렬한 고백으로 변모한다.


유가족 명단의 공백과 혈연의 환상

포착되는 서사의 뼈아픈 지점은 가족이라는 제도의 허상이다. 작가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한 달이나 지나서야 접하고, 조카의 휴대전화에 담긴 장례식 녹화 영상을 통해서만 그 죽음을 간접적으로 목도한다. 무엇보다 유가족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혈연이라는 견고한 믿음을 부순다. 조카가 이모인 자신에게 남자친구가 있는지를 묻는 장면은 서글픈 단절을 방증한다. 친가족조차 그녀의 성 정체성을 알지 못해 그녀를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않은 사람으로 오해하는 상황은 이들이 물리적으로는 마주 앉아 있으나 정서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지독한 소외감 속에서 텍스트는 단지 입양인의 슬픔에 머물지 않고, 피를 나눈 가족이라 할지라도 서로의 고유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짚어낸다. 나아가 가족이라는 당위적인 굴레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고립감을 조명하며, 소통이 불가능한 핏줄을 향해 그토록 끈질기게 손을 뻗는 행위의 의미를 독자에게 되묻는다.


침묵과 공백으로 쓰인 입양의 기록

작가는 애초에 덴마크어, 영어, 한국어라는 세 가지 언어로 이 글을 쓰려 했으나 결국 포기해야 했다고 고백한다. 두 개의 가족, 두 개의 문화, 두 개의 역사를 안고 있음에도 자신은 이중언어 사용자가 아니라는 자각이 이 독보적인 문학적 기법을 탄생시켰다. 텍스트 곳곳에 자리 잡은 의도적인 여백들은 단순히 시각적인 쉼표가 아니라, 입양이라는 사건이 개인의 삶에 남긴 커다란 공백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한국계 덴마크인 여자친구는 사랑하는 연인이자 가장 신뢰하는 입의 역할을 하지만, 그녀의 존재 자체가 화자에게는 모국어의 상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언어의 장벽에 부딪힐 때면 허공에 수영하는 시늉을 하거나, 몸짓으로 전복을 묘사하는 등 육체의 언어에 의존하며 소통을 포기하지 않는다.


푸른숲 신간 <나의 통역사>는 소설가 김혜진의 추천사처럼 잃어버린 언어의 자리를 디아스포라의 영토 안에서 채워나가는 서글프고 완강한 투쟁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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