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시인은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2012년 등단했다. 이후 <진심의 바깥> <일종의 마음> 등의 시집과 산문집 <시가 되는 순간들>을 펴내며 2030 세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작가다. 최근 고아성, 카리나, 문상훈, 박정민 등 다양한 분야의 유명인들이 그의 작품을 언급하며 이른바 MZ 세대의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먼곳프레스 신간, 세 번째 시집 <슬픔의 펼침면>은 일상의 고단함 속에 숨겨진 서늘한 그늘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시인은 치열한 현실에 지친 이들에게 섣부른 위로 대신 슬픔을 새롭게 정의하고 재회하는 감각을 일깨운다.
서두에 실린 짧은 시인의 말이 눈에 들어온다. 시인은 "우리를 길러낸 건 / 슬픔을 접는 능력이었을걸"이라며 삶의 고통을 대하는 시인들 고유의 태도를 제시한다. 팍팍한 삶을 견디기 위해 슬픔을 접어두는 행위는 현실 도피가 아니다. 언젠가 꼬깃하거나 단정하게 접힌 면을 펼쳐 다시 꺼내어 볼 날을 기약하는 다정하고 성숙한 유예다. "나의 슬픔이 / 너의 슬픔을 되오는 세계에서"는 시인의 내밀한 슬픔을 내보이는 행위를 통해 시집을 펼치는 모든 이들의 슬픔 또한 어딘가의 경계에서 우연히 재회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시집은 1부 '빛나는 존재들의 무게를 받아쓰려고'에서 시작해 4부 '한 이가 한 이를 되오는 세계에서'까지.. 총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상실과 아픔을 부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시인의 마음을 펼치기 시작하는 12쪽 <시소와 시>.. 아끼는 책과 일기를 시소 반대편에 두고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지 바라보는 시인의 담담한 모습이 떠오른다. 아슬한 수평을 유지할까? 아니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질까? 어찌했든 시인은 빛나는 존재들의 무게를 감각하며 받아쓸 것이다. "꼭 한 번은 슬픔을 펼친 면을 보고 싶다 / 아끼는 것들이 나란히 접히는 모양을"이라는 구절은 펼침면에 고인 아득한 슬픔, 아끼는 것들이 사라지는 두려움을 끌어안으며 읽는 이의 마음에 아릿한 잔상을 남긴다.
110쪽 <유예하는 기분>.. "여전히 우리는 슬픔을 경유합니다 / 백지에 적힌 이야기를 읽지 말아요 / 보이는 슬픔을 다그치지 않기로 해요"라고 고백하며 상실, 공허감에 잇따르는 슬픔을 극복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선명히 보이는 그 감정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함부로 자책하지 않고, 나무라지 않으면서 작아질 때까지 접고 접어 저 바다로 흘려보내던가, 아니면 으슥한 골목길 담장 틈에 꽂아둘 수도 있겠지..
120쪽에 수록된 시 <동경과 망각>에서 시인은 동경을 가능케 하는 것은 망각의 능력을 믿어보는 것이라 말하며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 고단한 날마다 잊는 능력"을 청춘의 무기로 꼽는다. 불가역적인 시간 앞에서도 묵묵히 일상을 지탱하고, '잊음'을 통해 내일을 살아갈 힘을 회복하는 단단한 내면이 돋보인다.
150쪽 산문 '당연한 슬픔과 필연한 재회'에서 시인은 삶의 순간순간을 접고 펼치는 면이 유난히 해진 곳들은 어김없이 슬픔이 배어 있었다고 고백한다. 닳고 해진 이 면들은 석양이 물드는 수평선처럼 정의할 수 없는 색이 혼재하는, 일종의 경계와 닮아 있다. 시인은 이 시집이 밖으로 표출하는 고음이 아니라 안으로 절제하는 '저음의 혼잣말' 같다고 덧붙인다. 접어둔 곳들을 다시 펼치기 위해 격렬한 토로 대신 차분한 책갈피가 필요했음을 표현하는 대목이다.
김다솔 문학평론가가 짚었듯.. 오해의 능력으로 멈춘 것들이 되살아나는 영원한 제철을 살아내는 시어들은 각별한 울림을 지닌다. 156쪽 추천사에서 배우 고아성이 "햇빛에 색이 바랜 아주 화려한 찻잔처럼 슬픔에도 품위를 부여하는 글"이라고 찬사를 보냈듯 <슬픔의 펼침면>은 홀로 견디는 밤에 다정한 위안을 건넨다.
세상에 태어난 이들이라면.. 슬픔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굽이치는 삶의 경계마다 반복되는 고통, 상실, 외로움 속에서 우리에게 왜 시가 필요한지 이제야 시인은 의연한 목소리로 증명한다. 숨 가쁜 일상 속에서 미처 다듬지 못한 무너진 마음을 살피고, 다시 만난 슬픔을 주워 담담한 마음으로 펼쳐 바라보게 하는.. 기어코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하는 귀중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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