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는 심플하다. 영혼까지 맑고 똑 부러지는 미국 소녀 이사벨이 유럽 상류사회에 진출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여기에 막대한 유산까지 상속받으며 "아싸, 이제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플렉스하며 살아야지!"라고 외쳤으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돈 냄새를 맡고 꼬여드는 속물들의 화려한 가스라이팅 기술에 휘말리게 되면서 오스몬드라는 똥차, 그리고 이사벨 인생에 그 거대한 똥차를 밀어 넣은 취업 사기 기획사 대표 마담 멀, 앤드 혹 팬지...를 만나 꼬이게 되거든. 흔한 옛날 소설이라면 "결국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 불쌍한 여주인공을 구원해 주었습니다"로 끝났겠지만 이사벨은 ‘남주 잘 만나 팔자 고치는 뻔한 로맨스’의 시나리오를 시작부터 찢어버린다. 이 소설의 백미다. 질풍노도를 겪으며 멘탈 탈탈 털리지만 결국 자신이 내린 모든 선택의 무게를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이사벨, 그녀는 비록 주변 환경은 쇠창살 없는 감옥 같을지라도, 정신줄만큼은 단단히 붙잡고 인생의 운전대 남한테 아웃소싱하지 않는 상녀자적 모먼트를 보여준다. 주변에서 온갖 남자들이 "내가 널 구원하겠어!"라며 메시아 빙의를 시도하지만, 남성에게 종속되는 서사 자체를 초반부터 단호하게 거절하는 이사벨. 그리고 그 의지는 남편이 아닌 '나만의 관계망'을 지키기 위한 능동적 선택으로 이어진다. 그 의미로 다들 의아해 하는 로마로의 귀환은 남편에게 복종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진심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타인들과의 관계를 책임지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특히 팬지를 오스몬드의 가스라이팅과 통제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약속은 핵심적인 계기였을 것이다. 이는 가부장제라는 폭력적 구조 속에서 더 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연대하겠다는 '여성적 책임감'의 발로로 볼 수 있을 터. 비록 남편과의 심리적 관계는 완전히 끊어냈을지언정,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도덕적 의무는 끝까지 짊어지겠다는 의지랄지.. 여튼 21세기의 여성 독자가 보기에 결론이 다소 고구마일 수 있겠으나 19세기 통념상 불행한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대개 '진짜 좋은(?) 남자'를 만나 구원받는 낭만적 해피엔딩이었음을 생각하자면 100년 전 이사벨은 남성 중심의 서사로부터 충분히 영리하게 탈출했다고 생각한다.
참 거시기한 번역이 거슬리지만 나 따위가 뭐라고 역자를 욕하랴 참고 참다 보면 어느새 익숙해지는 묘하게 말도 안되면서 되는 번역ㅋ
여튼 한줄평: 내가 싼 똥 내가 치우지, 누가 치우나. 자력 인생 맵다, 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