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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부터 20세기까지 대략 천 년 간 이어지며 전 유럽을 호령했던 한 가문이 있다.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이다. 우리는 이 가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많은 대중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이라고 하면 아마도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과 주걱턱을 떠올릴 것이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부는 아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비단 유럽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문으로, 세계사에서 이들의 이름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는 오늘날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와 같은 중동부 유럽과 스페인 그리고 네덜란드, 벨기에에 해당하는 지역에 속하는데, 하나같이 국내 서양사학계에서 불모지로 취급받는 곳이다. 국내에 합스부르크 가문을 다루는 개설서는 딱 한 권 있었는데, 역사 전공자가 쓴 책이 아니며, 그마저도 현 시점에는 절판되었다. 시대별 혹은 지역별 개설서가 한 두 권 씩 번역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들 저서의 초점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있지 않다.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을 들어본 사람은 적지 않지만 그들에 대한 이미지는 일천년간 유럽을 들었다놨다한 영향력 있는 왕가가 아닌 부정교합과 주걱턱을 가진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가진 이들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는 우리에게 멀고 익숙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차츰 해결이 될 듯싶다. 국내에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를 다루는 개설서가 번역,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영국 출신의 중앙 유럽사 전문가인 마틴 래디(Martyn Rady)의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가 그것이다.
래디의 저서는 10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의 등장에서부터 여러 제후들과의 혼인동맹을 통한 가문의 세력 확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신대륙에까지 걸친 거대한 제국, 절대주의와 빈 체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제1차 대전과 제국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의 역사를 29개의 장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각각의 장은 가문의 인물 하나에 집중하거나 시대별 예술, 과학, 사회를 다룬다. 가령 마리아 테레지아 개인에 대한 일화와 치세는 제17장 ‘마리아 테레지아, 자동인형, 관료들’에서 다루어지지만 그의 치세의 전반적인 상은 18, 19, 20, 21장에 걸쳐 분야별로 서술된다.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의 본문은 500쪽이 조금 넘는다. 책을 구성하는 장(章)의 개수는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고 총 29개로, 한 장당 15쪽에서 20쪽의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한 장의 호흡이 길지 않고 장별로 주제가 명확하기 때문에 읽고 싶은 부분을 선독할 수 있다.
“확실히 프리드리히는 내성적이고 침울했고, 여행할 때 달걀 값을 아끼려고 닭둥우리를 가지고 다닐 정도로 인색했다. 하지만 결코 나태하지는 않았다.” (83쪽)
“중앙 유럽의 유대인 사회는 서유럽보다 수적으로 규모가 더 컸다. 18세기 중엽 중앙 유럽, 즉 오스트리아 영지, 보헤미아, 헝가리 등지에는 대략 15만 명의 유대인이 살았다. 1771년에 갈리치아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편입됨에 따라서 여기에 유대인 인구 20만 명이 추가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땅뙈기를 일구고 사는 농촌 사람들이었다. … (중략) … 1900년에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유대인이었던 체르니우치(부코비나 지방의 수도)는 이디시어 사용을 비롯한 중앙 유럽 유대인 문화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발돋움했다.” (469쪽)
저자는 또한 위에서 예시를 든 것처럼 때로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 묘사하는 문체를 쓰다가도 때로는 거시적인 흐름을 단번에 개괄하는 문체를 자유자제로 구사하고 적절한 비유를 통해 설명을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비교적 가볍게 넘길 수 있다.
문제점을 굳이 지적하라면 발칸과 지중해 지역을 놓고 경쟁을 벌였던 오스만 제국 관련 서술은 굉장히 낡은 인식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역사는 흔히 술탄 10명이 차례로 통치한 초반의 급성장기와 술레이만 대제 치세의 전성기, 이후 술탄 26명이 다스린 후반 400여 년의 쇠퇴기로 구분된다.” (164쪽)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근대화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1990년대 이래 17, 18세기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사실상 학계에서는 사장된 이론이다.
“한편 오스만 튀르크인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방어력을 시험했는데, 1529년 가을에는 빈을 잠시 포위할 정도였다.” (119쪽)
“튀르크인 병사들은 할리우드 영화처럼 적국의 갤리 선에 밧줄을 던져야 했던 반면, 스페인 함선들은 병사들 여러 명이 한꺼번에 올라탈 수 있는 그물과 멍석을 갖추고 있었다.” (169쪽)
“튀르크인들과의 전쟁을 시작할 때, 레오폴트는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기로 약속한 제국 의회뿐 아니라 몇몇 대제후들의 군대에서도 도움을 받았다.” (244쪽)
상기한 사례들 이외에도 책 전반에 걸쳐 오스만 제국의 사람(주로 군대)을 지칭하는 단어로 (오스만)튀르크인이 사용되고 있다. 민족 간의 분규로 점철되었던 역사의 최후반부를 제외한다면 오스만 제국은 여러 민족이 공존했던 다종족·다문화 제국이었다. 오스만 제국을 튀르크로 단순화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번역의 질은 전반적으로 훌륭하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민족들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중앙유럽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여러 국가의 인명과 지명이 동시에 등장하기 때문에 개별 언어의 표기법을 일일이 찾아서 적용해야하는 수고가 필요한데, 역자는 이를 대단히 깔끔하게 해냈다. 문장 또한 물 흐르듯이 쉽게 읽힌다.
다만 몇 가지 번역상의 문제점은 지적하고 넘어가야한다.
“그 책들은, 알자스 지방의 에티호넨 가문에 속한 정체불명의 백작들부터 프랑크족 메로빙거 가문의 왕들(5세기에 메로빙거 가문을 개창한 시조는 퀴노타우루스, 즉 뿔이 다섯 개 달린 괴물 황소였다고 한다)에 이르기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형통을 따라가며 마주치는 온갖 추측들로 가득하다.” (32쪽)
Merowinger는 독일어식 명칭이며 영어식 명칭은 Merovingian이다. 두 단어는 모두 Meroving을 어근으로 하는데, 이 Meroving은 가문의 시조인 메로베우스(Meroveus)에 왕조, 가문, 후손 등을 의미하는 접미사 -ing이 붙은 형태이다. 따라서 Meroving 자체가 이미 메로베우스 왕조/가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칭이나 독칭은 여기에 -ian, -er을 붙여 왕조/가문의 의미를 더한 것이고 국내에서는 독일어 명칭에 왕조/가문까지 붙여 메로빙거 왕조/가문으로 흔히 통용되는데, 그 의미를 해부하면 메로베우스 왕조 왕조 왕조인 셈이다. 역자가 수학했던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중세사를 담당했던 유희수 교수는 이를 메로베우스 왕조로 표기한다.1)
“1861년에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그동안 미국이 초래했던 지정학적 위협이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428쪽)
“1865년에 미국 독립 전쟁이 막을 내리자 공화파 군대는 잉여 무기로 재무장하고 외국으로부터 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게 되었다.” (434쪽)
1861년에 발생하여 1865년에 종결된 전쟁은 의심의 여지없이 미국 독립 전쟁이 아니라 남북전쟁이다. 원서를 대조해볼 수 없어서 저자와 역자 누구의 실수인지는 모르겠으나 매우 기초적인 실수임에는 틀림이 없다. 직업적 번역가인 역자가 두 번씩이나 저지를만한 오역은 전혀 아니며 저자의 오류라고 해도 역자가 바로잡아야만했다.
종합하자면 국내에 최초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사를 소개하는 이 책은 그 분량이 500여 쪽으로 적지 않음에도 저자의 능수능란한 문장과 역자의 말끔한 번역으로 읽기에 그렇게 부담 가지 않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록 특정 부분의 서술에 문제가 있기는 하고 오역도 없지 않지만 책의 흐름을 해치는 수준은 아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 근현대 오스트리아와 유럽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1) 유희수, 『낯선 중세』 (문학과지성사, 2018), 58쪽.
본 서평은 부흥 카페 서평 이벤트(https://cafe.naver.com/booheong/215652)에 응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