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에 구원 받는다는 것 >의 첫 느낌을 이야기하자면 표지가 너무 귀엽다! 였다.
흡사 동화책의 사랑스런 표지같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동화책은
표지부터 속지까지 모두 다 이야기에 포함이다. 하다못해 속지의 색깔까지.
그래서 처음 이 책의 표지만을 보고는 가벼운 이야기일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들에 의아했으나
(개인적인 적응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마지막에 되어서야 그 표지가 이해가 됐다.
( 표지를 정말 잘 뽑은듯!! 책의 내용을 충분히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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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말의 존엄과 언어의 ‘내리쌓이는’ 성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래서일까? 책에 나오는 17가지 테마의 끝에는 결국 다음세대에게 훼손된 말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그 존엄을 우리가 힘써서 회복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책에는 많은 포스트잇을 표시할 만큼 흥미롭고 새로운 시선들이 가득했다.
그 중 몇가지를 가지고 와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P.118(제9화 분위기에 지워지는 목소리)
제도보다 분위기의 위력이 더 크면 사람은 분위기에 좌우되어 살아가게 된다. 분위기를 만드는 쪽에 속한 사람은 그래도 딱히 불편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사회에는 만들어진 분위기 속에서 살아갈 것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한테 분위기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은 공포스러울 뿐이다. ‘강자가 약자를 그때그때 분위기에 따라 대우해도 된다’는 뜻이기 떄문이다.
P.122(제9화 분위기에 지워지는 목소리)
<<남자들은 장애인 운동에 꿈과 낭만을 걸었고, 여자들은 하루하루의 생활을 걸었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무겁다.
P. 166(제13화 살아가는 데 사양이 필요있을까?)
이 시가 발표되었던 시대에 장애인 돌봄은 주로 가족이 떠맡았다.사회,세상,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가족이 묵묵히 맡는 이야기들이 미담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러한 ‘사양’이 돌고 돌아, 쌓이고 쌓여, 장애인 본인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결과적으로 이시에는 자신을 돌보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 몸부림 치다가 결국 <<나를 미워하십시오>>라고 호소하기에 이르고 만다.
책에는 특히나 장애인의 권리나 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아무래다 작가가 소수자의 자기표현법과 장애인의 사회 활동을 연구하고 있기때문이리라.
장애인의 차별이나 권리에 해단 이야기를 우리가 얕게 알고 있지만
책에서 ‘장애인+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차별안의 또 다른 차별이 존재함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책을 통해서
또 다른 부분을 알게 되고 의식하게 된 거 같아서 조금더 알아보고 싶다.
사양한다는건 미덕이 아닐까. 다진 오뎅이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우리의 생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몰랐던 것이다.
그 말이 누군가에게는 중요함을 너무나 우리의 기준으로 가벼운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쪽 편에 있기 때문에.
그렇기에 말따위 좀 정확하지 않고 뭉개지면 어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 더 중요하다는 작가의 이야기에 깊게 공감이 간다.
말을 통해서 정확히 알려져야 하고 같이 공감할 수 있게 되어야 함께 개선과 위로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다보니 계속해서 머리속에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었다.
예전 [ kbs 시사적격 프로그램 ‘나는 효녀가 아니다. 청년, 간병 ] 중에서
“효녀라는 말을 들으면 어때요?”
“그 틀안에 계속 갇혀있어야만 하는거 같아요”
“제가 그래서 찾은 말이 저는 효자가 아니라 시민으로 아버지 돌봐요.라고 말을 했거든요. 효자라는 말로 제가 하는 행동을 돌봄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으면 좋겠어요. 내가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단순히 가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고 있는게 아니에요‘라는 말을 저는 사람들에게 되갚아 줬던 것 같아요”
이 말을 처음 봤을때, 그래 효녀,효자라는 틀안에서 나름의 괴로움이 있을수 있겠다.고
미루어 짐작했다. 그런데 오랜 간병생활을 한 청년은 자신은 시민으로 아버지를
돌본다고 한다.
그 차이가 무엇이 있을까? 라고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있다.
돌보는 사람이 나인건 변함이 없는데 왜 그는 효자라는 말 대신에 시민이라는 말로
자신을 설명하고 사람들에게 되갚아. 준다고 말을 했을까.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그 감정을 책을 통해 좀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효자와 시민의 차이가 뭘까. 그 말 하나 바꾼다고 뭐가 달라질까. 나의 생각은 작가가
이야기한 ’자기책임‘의 시선으로 나도 모르게 보고 있던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말의 힘은 중요하고도 대단하다.
효자라고 생각하면 그 일은 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민이라고 생각하면 우리 모두가 고민하고 함께 나누어야 되는 일이
되어버린다. 적어도 나에게는 효자와 시민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개인적인
일에서 연대가 필요한 일로 전환이 되는 경계가 되었다.
많은 이야기를 담았지만 이 책은 우리 함께 살아가자고. 조금 다듬어진 말로 서로를
찌르지 않고 보듬어 가며 살아가자고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책의 내용도 의미가 깊었지만 문학자로서의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서평을 마무리하고 싶다.
P.92(제6화 장애인 시설 살상 사건이 망가뜨린 것)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할 건데? 자네는 어떻게 하고 싶어?
중요한 것은 ‘나’라는 ‘작은 주어’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글을 쓰는 일입니다. 글을 계쏙 쓰는 일입니다. 예전에 경종을 울렸다는 것. 경종을 울린 사람들이 있었다는것. 그 역사를 말로 바꾸어 다시 한 번 이 시대에 울려 퍼지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는 내년에도, 후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7월이 오면 사가미하라 사건에 대해 쓰려고 합니다. 함께 이 문제를 생각하고, 이 문제를 놓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계속해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려고 합니다.
P.183(제14화 ‘서로 입 다물리기’의 연쇄를 끊어야 할 때)
일단 나는 ‘지금 이 순간 화난 사람, 분노하는 사람, 억울한 사람’을 고립시키지 않는 일부터 하고 싶다. ‘자기 책임’이 ‘사람을 고립시키는 말’이라면 ‘사람을 고립시키지 않는 말’을 찾아 서로 나눠야 한다. 한 사람의 문학자로서 그런 ‘말찾기’를 계속해 나가고 싶다.
P.201(제17화 말이 ‘문학’이 될때)
내 나름대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해보자면 요컨대 ‘곰인형’같은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무언가가 없다고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생활’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지만, 힘들거나 괴롭거나 외로울 때 살며시 ‘사진을 지탱해 주는 것’이 이 세계에는 있다.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구원받은 느낌을 주는 것.
그 존재를 믿으려는 마음의 움직임, 그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라는 개인은 그 런것을 ‘문학’으로 여기며, 그런것이 지닌 힘을 해명하고 싶다.
작가는 반복적으로 문학자로서의 삼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정말로 사명감을 가지고 글을 써내려가기 떄문에 자연스럽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삶의 태도인것이다.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의 대지>중
그러나 그의 진짜 장점은 거기에 있지 않다. 그의 위대함은 책임을 느낄줄 아는 데 있다. 자신에 대한, 우편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 말이다. 그의 손에 그들의 고통과 기쁨이 있다. 저기,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새로운 것을 이룩하는 데 참여해야만 한다는 책임감,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의 한도내에서 인간의 운명에 대해 느끼는 약간의 책임감. 그는 넓은 지평선을 자신의 잎사귀로 덮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대범한 존재에 속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정확히 책임을 지는 것이다.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비참함을 마주했을때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동료들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자신이 쥔 돌을 하나씩 쌓으며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작가의 손에 쥔 돌은 말의 존엄에 대한 것이다. 작은 그 돌 하나 위에 우리가 연대와
행동을 통해 또 다른 작은 돌 하나를 얹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문학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하게 되는 수 많은 말들은 우리 다음 세대까지 염두해 두지 않아도 우리에게
결국 돌아오게 된다. 재해라는 것이, 사고라는 것이 그러하듯이 지금 내가 머물지
않은 상태일뿐, 누구라도 언제든이 그 상황에 있을수 있는 일이니까 말이다
( 부디 모두에게 그런일이 없길 간절히 바란다)
우리 조금만 더 존엄한 말을 사용하자.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는 시작은
그런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