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설의 후기 마지막 주저작인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의 일독을 마쳤다. 훗설이 전체적으로 자신의 현상학을 조망하는 형식을 이루고 과거 철학들의 특징과 비교를 추적관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선험적 현상학이 어떻게 과거의 철학을 품에 안고 발전해 나간 학문인가를 차분히 설명해 나가는 형태이다. "데카르트적 성찰"이 현상학의 작동기전과 그 핵심인 선험적 자아의 정체와 선험적 현상학이 성취해내는 결과가 우리가 평소 파악하고 있는 세상과 어떻게 달라져서 그 의미가 획득되는가를 밝히는데 핵심이 있다면, 이 책은 미리 주어진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선험적 현상학을 이용하여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본래적인 세상을 파악해내는가를 일반 대중들에게 설득해 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면에서 "성찰"과 "위기"는 상호 보완적이다.. 어떻게 보면 "위기"를 먼저 일독하고 "성찰"을 공부하는 것이 좀더 편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성찰"은 철학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므로 군더더기가 없고 선험적 현상학의 핵심에 대한 탐구에 매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위기"는 현실적 토대에서 철학적 탐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기때문에 일견 좀더 이해하기 쉬운 점이 있으나 뭔가 번잡하고 선험적 현상학의 핵심에 대한 논의가 흐려지는 경향이 있다. "위기"자체에 대한 큰 논의는 필요없을 듯 하다. "성찰"에서는 좀 흐릿했던 "판단중지"와 "현상학적 환원"에 대한 논의가 좀더 명확히 정리되었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훗설의 현상학의 제자들이 결국은 다 버리고 떠난 선험적 자아에 대한 논의는 원론적인 부분에 머무르고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제자들이 현상학적 방법론인 판단중지와 현상학적 환원만 받아들인 이유도 사실 선험적 자아의 정체성이 모호하기때문이다. 하지만 훗설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고 자신의 제자가 결국 현상학의 핵심인 선험적 자아에 대한 논의는 다 팽개치고 결국은 방법론적인 현상학의 전개속에서 섣부른 비본래적인 현상파악과 "존재"에만 머물러고 있다고 한탄한 것을 보면 "선험적 자아"의 파악과 정체는 사실 훗설 현상학에서는 핵심일 수 밖에 없다...훗설의 책을 읽어보면 훗설의 현상학은 기본적으로 "포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존 모든 철학적 논의의 의의와 중요성을 인정하고 가져오되 "선험적 자아"의 필터링을 통한 "현상학적 환원"의 결과물로 재탄생해야함을 강조할 뿐이다. 결국 현상학적 환원이란게 단순히 편견을 버리거나 통상적인 사회적 통념을 벗어나는 정도를 넘어서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제일 순순한 상태의 주관적 상태 - 인식을 제일 순수하게 진행할 수 있는 레벨의 자아 단계 - 에서 획득해지는 대상의 의미, 세계의 의미 그리고 이런 개개인의 선험적 자아들이 확득한 의미들의 총합이자 공통합이 만들어내는 "상호주관적 선험성"이 궁극적 획득물이기에 이 선험적 자아에 대한 이해와 인정없이는 "훗설"의 현상학은 이해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훗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선험적 자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의식하는 자아에 속하는 것이다. 단지 그걸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그 단계로 내려가기위해서는 끊임없는 판단중지를 통해 세상을 살면서 덧붙여진 많은 자아의 껍질들을 다 떼어내고 순수자아의 단계로 내려가서 대상과 세상을 인지, 인식해나가야 진정한 현상학적 환원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또한 초기에는 형상적 환원으로 모든 대상과 세계를 정의하고 형태짓는 잡다한 것을 다 떼어내고 순수한 형상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통해 대상과 세계의 본질과 핵심을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이 작업이후 이러한 대상과 세계가 나에게 진정 다가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파악하여 대상과 세계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진행하게되는데 이것이 "현상학적 환원"의 최종단계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들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이 살아가는 동안에 집단이 영속하는 동안에 지속적으로 일어나면서 거대하게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 생기는데 이걸 훗설은 "객관"이라고 한다. 자연과학적 객관과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여기서 꼭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두가지가 생긴다.. 첫째는 과연 훗설이 이야기하는 순수자아에게 대상과 세계를 순수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인가? 순수자아가 대상과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은 "직관"인데 이런 방식이 과연 받아들일만한 것인가? 혹은 심지어 이런 순수자아라는 것이 우리가 사고실험을 통해 만들어 낸 허상이 아닌가 하는 부분이다. 둘째는 "성찰"에서 오이겐 핑크가 고찰한 것인데 순수한 자아가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대상과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인데 그걸 현상학적 환원이후 우리가 대상과 세계에 적용할 때는 다시 지금 사용하는 언어와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언어도단"의 단계의 이르고 다시 언어의 세계로 돌아온다면 같은 언어로 표현하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달라지는 일종의 "비유"가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되었을때 상호주관적인 부분으로 나아가면 어떻게 상호소통이 적절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상호주관적인 공통점으로 합의된 부분이 "객관"이 되는 훗설의 논의는 여기서 큰 고비를 맞게 된다...한편으론 훗설의 고뇌가 이해가 된다. 실제적인 객관적 팩트만으로 인간이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은 인간 자신이 파악하고 판단하여 의미부여한 것으로 대상을 정의하고 세계를 정의하고 소통한다. 물론 객관적인 사물과 세계들이 중요하나 여기에 제대로 된 의미부여가 추가됨으로써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오늘날 과학의 시대와 도구주의적 시대에서는 이런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방식을 깡그리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의미부여하는 주관적 과정의 철학적 논의와 진리성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 훗설의 의도였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철학이 개똥철학을 넘어서 인간이 살아가는 삶속에 실제로 작동하는 양식을 보여주는 친절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런 시도는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진리문제를 다루는 "철학"이 되면 또 다르다. 훗설의 문제의식을 해결할 수 있는 철학적 논의는 사실 훗설 자신도 그 제자들도 아직 우리에게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단지 의미부여의 주체에 대한 논의와 그를 통한 본래적/비본래적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 부분에서 현상학은 탁월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