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문트 훗설의 “데카르트적
성찰”을 일독하였다. 어떻게 보면 관념론적 인식론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현상학을 집대성한 책이라 오히려 흥미롭게 공부했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지금 파악하고 있는 세상과 다른 사람들은 정말 내가 그냥 이렇게 파악하고 있는 것 그대로인가?
아니면 더 본질적 – 본래적 의미가 있는 건가?
세상은 그냥 단순한 물체들의 나열로 나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봄직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관념론적 인식론의 테두리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칸트와 헤겔을 넘어서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합의를 이루어 나가고 세계를 구성해 나가는 건가를 “현상학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훗설이 내세우는 기본 가설은 우리가 바깥의 대상을 인지하는 것은 항상 목적을 가지고 지향하는 의식이다라는 것이다 . 훗설의 현상학은 기본적으로 의식철학이고 주관적 관념론의 세계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바깥세상의 대상을 어떻게 파악하고 그 의미를 어떻게 구축하고 그 대상들을 엮어 어떻게 세계를 구성해내는가에 포커스를 맞춘다. 단지 독단적 관념론이나 유심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나와 다른 사람사이에 “상호주관성”이 생성되기에 최소한 객관성과 합의들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철학의 핵심은 “나”의
의식이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고 의미부여하고 해석하는가에 대한 질문이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파악하는 현실적 파악은 “자연적 태도”애서 생성된 것이라
“본래적” 의미가 은폐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나 자신과 타인 그리고 나를 둘러싼 사회 그리고 세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나도 모르게 하고있는 "자연적 태도" 아래에 하고 있는 인식작용을 정지하고
본질을 직관해 들어가야한다고 한다.
이러한 인식작용의 정지를 소위 “판단중지 – 에포케”라고 하고 일체의 현실적 판단을 중지하면 오롯이 남는 "순수자아"에 의한 "본질직관"을 통해 대상을 파악해 그 진정한 의미와 해석을 진행하는 것을 “현상학적
환원”라고 한다. 이러한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나 자신과
타인, 사회, 그리고 세계를 새로이 구성해 나가면 이제야
은폐된 것들이 밝혀 드러나서 진정한 존재를 알게되고 실천하게 된다는 것이 훗설 현상학의 얼개이다.
“판단중지”부분은 현상학적 방법론이라고 하는데 훗설의 본질직관이나 순수자아등의 극히 관념론적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 철학자들이라도 이 현상학적 방법론을 받아들여서 이후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 사르트르, 가다머, 레비나스, 오이겐 핑크의 철학들이 피어나는 시발점이 된다.
"판단중지"를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거칠게 말하면 “선입견을 중지한다”라고 할 수는 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선입견은 뭔가 “잘못 알려진 인상”이라는 뉘앙스가 강한 반면, 훗설이 이야기하는 판단중지의 대상은 “지금 세상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런 의미로 파악되는 모든 것”이라 상당히 다르다.
기본적으로 훗설은 나 자신에 대한 파악에서부터 타인, 사회, 세계에 대한 파악은 현상학적 판단중지와 환원을 통해 재구성되어야 그 실체가 드러난다고 본다. 그래서 자연과학적 파악으로 알려진 인간, 대상물체 그리고 자연은
인간 각자가 이러한 판단중지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새로이 파악되어 그 은폐가 드러나야 한다고 본다.
자연과학적 파악, 사회과학적 파악 등 일반 세속학문들도 각각 진리를 담보하고 있기는 하지만
부분뿐이라 이러한 현상학적 작업을 통해 그 전체의 진리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 훗설의 주장이다. 실증주의적
자연과학이나 기타 학문들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되 그 전체의 면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상학적 판단중지와 환원작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다른 관념론이나 유물론이 일방적인 주장을 하는 점과 다른 점이다.
이 저술의 마지막 부분은 훗설의 제자인 오이겐 핑크의 논문으로 되어있는데 이 부분은 훗설이 인정해서 수록한 것이라 원저서로 인정될
수밖에 없으나 오이겐 핑크가 훗설의 현상학을 자기나름대로 해석하고 확장한 부분도 있어서 앞부분 훗설이 저술한 것과는 사뭇 문체도 다르고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것도 다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영향도 강하게 놓여있고 형이상학적 체계정립을 하고자
하는 열망도 보이는 듯하다.
이중 흥미로웠던 부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로 세상의 대상들이나 현상을 설명하는 부분들이 판단중지 후 순수자아의 본질직관에
의해 파악되는 순간 언어를 잃을 수밖에 없는데 이걸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현상학은 종교적 체험과 유사한 길을 간다.
종교적 체험은 그 깨달음 자체를 표현할 길 없다라고 하고 그걸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표현할 때 비유를 들어서 진행한다.
현상학적 본질직관 이후 환원을 진행하면 다시 보통 세상의 언어로 표현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 때는 본질직관에 의해 깨달은 것에 가장
가까운 유비적 언어로 다시 풀어놓게 되는데 (이걸 2차 세계화라고
한다) 같은 단어로 표현하고 있더라도 사실은 다른 층위의 이야기를 하는 단어와 언어가 된다고 핑크는
설명한다.
그래서 핑크는 현상학적 환원 작업을 해본 사람만이 현상학적 환원된 언어의 의미를 다시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 판단중지와 환원작업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책만 읽어서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상당히 종교적
체험과 경전의 해석과 비슷한 이야기이지 않은가?
하여튼 이렇게 사람이 현상학적 환원으로 자신과 자신주위의 대상, 세계를 구성해 나가는데
제일 큰 문제는 혼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면 타인의 존재는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훗설의 이야기는 타인 역시 판단중지와 현상학적 환원을 하는 별도의 독립적 개체로 인정해야 하고 이러한 타인을 “감정이입”의 방법으로 내가 타인을 구성해 낸다라고 본다.
그 타인도 동일한 방법으로 나를 구성해 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부분은 “상호주관적 선험성”이 성립이 되므로 사람들이 모두 함께 같은 현상학적 환원 작업 하에 객관적 사회를 구성해 나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훗설에 있어서 “선험적”이라는
것은 경험이전의 것이라는 의미보다는 “본래적인” “은폐되어
있는 본질적인” 이런 의미에 가깝다).
유아론적 독단론에 빠지지않는 방법이기도 하고 훗설이 추구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훗설이
이야기하는 “객관”은 오늘날 우리가 자연과학적으로나 통상적으로나
의미하는 개개인의 주관적 생각이나 판단하고는 상관없이 성립되거나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하고는 거리가 멀다.
훗설에 있어서 객관이란 개인이 현상학적 환원으로 획득한 진리 값들이 사회적으로 상호주관적 선험성으로 받아들여질 때 성립하는 것이다. 자연과학적 데이터 값들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객관이나 상호주관적 선험성의 의미의 객관이나 대동소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적인 객관을 한번 생각해보면 기능주의적 학문성향으로 진행하면 현실과
괴리되고 사회구성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객관적 진리값이 되는 경우가 제법 있다. 이런 경우는 오늘날
말하는 집단지성이니 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훗설이 이야기하는 상호주관적 선험성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소위 “세상”에
노출되어 둘러싸여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세상은 일반적으로 자라오면서 자연스럽게 훈육이나 교육 등으로
일정한 기준에 의해 이러한 것이 세상이고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해야하는가 하는 것 등이 이미 인지 되어있는 상태이다. 이런 건 “주어진 세상”이고 “자연적으로 알게 된 세상”이다.
이렇게 주어진 세상만으로는 은폐된 것이 너무 많고, 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 부분이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오히려 세상과 괴리가 된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미 성립된
학문들이 규정하는 –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인문과학이든 심지어는 예술의 영역이든 – 세상의 얼개와 이치들도 개별 개인이 일단 이러한 이미 성립된 논리들을 모두 중지하고, 원래 이런 논리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신의 순수자아의
본질직관”으로 다시 파악해 보고 그 파악된 상태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을 재구성하여 나에게 진정한
본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세상을 드러내어 내가 진정한 나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라는 것이 훗설이 설파하는 내용의 핵심이 아닌가 한다.
훗설에 대한 개론서와 훗설의 주 저술 중에서 철학적 논의를 제일 논리정연하게 진행한 “데카르트적
성찰”을 공부해보니 현상학이 오늘날 철학과 사람들의 생각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은폐된 세상의 의미파악과 그 의미의 재구성하는 방법이 “순수자아의 본질직관”이라는 방법이라는 사실 일반적으로 확인하기 힘든 방법을 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기
힘들겠지만 (훗설식으로 이야기한다면 훗설의 선험적 주관성이 상호주관적 선험성속에 객관을 획득하기 힘들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듯 ...)
점차 고도로 전문화되어서 일견 진리라고 주장되어지지만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옳음을 확인하기 힘들어진 전문적인 여러 분야들의 총합으로
구성되어진 세상을 그냥 진리라고 믿기 힘든 사람들에게 다시금 세상을 새로운 기준으로 의미구성하고 재해석함으로써 나에게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진정한 세상이 되게 하는 그러한 길을 여는 방법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문적인 학문들로 무장해서 각 분야에 있어서는 그 분야의 전문학문의 결과만이 무조건적 진리값이라 주장되어지고 받아들여져서 유럽문명이
위기에 빠졌다고 파악하는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을
다음 책으로 공부해 볼 생각이다. 실제 세계에서 어떻게 선험적 주관성과 상호주관적 선험성으로 “생활세계”를 구성해 나가는가를 보여주는 훗설의 대표 주저술중 하나라
기대가 된다.
훗설의 저작은 광범위하고 개념들도 점차 변해가는 부분이 있어서 혼동이 올 수 있어 주요부분에 대해 정리를 해둔다.
훗설에 있어서 “본질”
본질은 사물이나 경험의 불변의 구조를 의미하며(그것이 그러한 것이기 위한 핵심 조건) 존재론적인
실재가 아닌 점에서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서구 형이상학의 본질과는 다르다. 훗설의 본질은 “의식”안에 주어지는 것으로 본질직관과 상상적 변형을 통해 파악되어지는
것이다.
판단중지(에포케)
: 평소에 가지고 있는 자연이나 세계에 대한 태도, 믿음(자연적 태도, 자연적
믿음)일시중지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세계가(세계내의 모든
사물이나 심지어는 자기자신) 의식안에서 어떻게 구성되어 나타나는가(현상)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지향성
: 의식은 언제나 어떤 대상을 지향하고 모든 인식은 ‘의식-대상’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깨닫게 되면 대상의 존재자체보다 그 대상이 의식에 어떻게 나타나는지(현상)에 주목한다
선험적 자아(초월론적 자아)
: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구조자체를 선험적 자아라고
한다. 이것은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자아와는 다르다. 각
인간 개체내에 있는 본질적이고 순수한 의미구성을 일으키는 의식구조를 말하며 경험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구조를 의미한다. 모든 형태의 의미구성, 시간구성,
대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의식구조.
상상적 변형
: 특정 사물이나 경험을 상상적으로 다양하게 변형하여,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필수 구조(본질) “를 직관하는 의식과정. 개별성을 넘어서 보편적 성질을 파악하는
단계.
본질직관
: 다양한 변형을 거친 후, 의식은
어떤 대상이 무엇인지를 '본질적으로' 파악(통찰)하게 된다. 직접적 통찰의 형태임.
상호주관성
: 타인의 존재는 나와 동일한 선험적 자아를 가진 존재로 감정이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 가능하고 각 개인들이 이런 작업들을 계속 수행하므로 각 개인의 주관성들은 상호주관성을 가지게 된다.
훗설의 객관
: 주관들의 공통구조속에 있는 세계가 객관세계이다. 객관성은 “지각적, 의식적
상호주관성에 의해 확인된 의미 구조” 를 의미하며,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파악할 수 있고, 동일한 본질을 직관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객관성의 확보는 본질직관과 상호주관성이 같이 일어나서 사회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훗설의 현상학적 환원의 흐름
1)판단중지 -> 2) 지향성의
분석 : 현상에 주목 -> 3) 상상적 변형(변형적 변이) -> 4) 본질직관: 다양한 변형을 거친 후, 의식은 어떤 대상이 무엇인지를 '본질적으로' 파악 -> 상호주관성을
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