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저마다 질문을 남긴다. 자살 역시 그렇다. '그때 연락을 했다면 괜찮았을까?', '왜 그런 선택을 한 걸까?', '그게 도와달라는 신호였을까?'.. 많은 질문들이 무엇이든 죽음을 막기 위해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이 있지 않았나 묻는다. 타인에게 듣던 나 자신에게 듣던 질문을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처가 되는 말들이다. 거기엔 책망이, 비난이, 자책이 그 모든 게 담겨 있다. 소설 속 케이틀린도 자문을 반복한다. 모든 게 추측이고 가정일 뿐, 진짜 이유를 상대에게 듣거나 실제 어떠했을까는 영영 알 수 없다.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떠난 그 사람 뿐이니까. 명확한 답은 하나다. 고인이 없는 삶이 내 앞에 있고, 나는 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고인으로서 그를 추억하며 그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에 적응해 가야 한다는 것.
그렇기에 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한 사람의 자리가 비워지는 것 이상의 경험이다. 내게 의미가 클수록 구분 없이 얽혀 있는 나무 뿌리들처럼 내 일상에, 내 기억에, 내 습관에 남아 있는 그 사람의 흔적 전체가 통째로 뜯겨 나가는 것과 같다. 그가 떠난 후에도 둘이 함께 경험한 일들이 녹아든 농담들, 한 쪽을 따라 시작한 덕질, 툭하면 배가 고픈 누군가를 위해 상비약처럼 갖고 다니던 초콜릿 뭉치.. 사소하지만 가짓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고인과 나 사이에 켜켜이 쌓여 있다. 모든 건 남겨진 사람의 몫이 된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이 말을 더 이어보면 모든 사람이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실의 경험은 겪는 사람에게도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무겁고 버거운 주제일 때가 많다. 이를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니나 라쿠르의 신작 '우리가 있던 자리에'는 자칫하면 무게에 짓눌리기 쉬운 상실의 경험을 쉬운 말들로 명료하게 그려내 한층 더 친밀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친구의 자살로 슬픔과 충격, 혼란에 빠진 케이틀린,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하지만 방법을 몰라 헤매는 부모님과 친구들, 그저 사건에만 관심을 갖는 동급생들, 자신의 고통이 버거워 케이틀린을 외면하는 선생님. 등장인물들도 모두 생생하게 그려져 케이틀린의 모든 일상에 동행하고 있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에게도, 그 곁에서 어떻게 위로해야 할 지 고민하는 사람에게도 모두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위의 두 상황에 한 번도 놓인 적이 없던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생소한 주제라 하더라도 분명, 시린 아픔을 보듬고 성장하는 케이틀린의 여정을 보는 것 만으로도 따뜻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